휴직일기, +8일(2021. 5. 10)
어느덧 회사에 나가지 않은 지 두 주가 넘었다. 첫 주는 둘째의 중간고사를 치르느라 경황이 없었고 지난주엔 둘째가 온라인 수업 기간이라 내내 집에 있는 관계로 또 짬이 나지 않았다. 두 주 동안 출근하지 않았는데 나는 가끔 낮잠을 즐기는 것 외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내가 이러려고 휴직을 하였나?" 하는 푸념이 절로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잠시 아이들의 등교를 챙기고 집안일을 정리하고 나니 비로소 온전히 나의 시간이 돌아왔다. 기쁜 마음에 서둘러 이 글을 쓴다.
앞서 아이의 중간고사 기간에 왜 아빠가 정신없이 바쁘고 힘들었을까 궁금해하는 이들이 계실 것으로 짐작된다. 그 이야기는 차후에 기회를 보아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내가 최근 세팅하고 있는 휴직 일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지난주를 지나며 큰 틀에서 나의 일과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유난스러울 것도 없고 거창할 것도 없지만 그 일상의 평범함과 세심함은 어떻게 보면 유별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단 내가 아내의 동의를 얻어 회사에서 허락받은 휴직 기간은 정확하게 10개월이다. 2개월 모자라는 1년이지만 복직 후 적응기를 고려하여 두 달 정도 유예기간을 둔 것이다. 물론 생활고에 대한 고려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나의 휴직 10개월은 크게 전반기 6개월과 후반기 4개월로 나뉜다. 두 아이의 대학 및 예고 입시 준비 기간인 6개월은 아마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것이지만 진정한 휴식기인 후반기 4개월의 속도에 비할 바 아닐 것이다. 1년 육아휴직을 경험한 아빠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입시 준비에 올인하기로 한 전반기 6개월을 나름대로 알차게 보내려 한다. 결국 나의 휴식은 생업이 배제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여느 전업주부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그 틈새를 비집고 세밀한 일상을 설계하고 있다. 아침엔 6시 20분 전에 일어나 아내를 돕는다. 두 아이의 아침과 도시락(우리 집 아이들은 모두 학교급식 대신에 도시락을 싼다. 이 이야기도 다음 기회에....) 준비에 정신없는 아내를 대신해 반려견 호두의 배변 판과 아침식사를 챙긴다.
시간이 남아 오늘은 딸아이 도시락에 넣어줄 포도를 씻었다. 껍질째 먹는 포도 씻기가 이토록 고난의 행군인 줄을 오늘에야 알았다. 첫째는 예고에 다니고 있어 학교가 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환승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평소에도 내가 출근길에 환승역까지 태워다 주곤 했다. 시간이 좀 더 여유로워진 요즘은 10여 분 늦게 출발할 수 있다. 고3 수험생에게 아침의 10분은 꿀 같은 시간이다. 큰애를 등교하기 가장 편한 역까지 태워다 주고 오면 대략 40분이 걸린다.
둘째는 집 근처 중학교를 다니지만 도보로 등교할 거리는 못되어 마을버스를 타고 다닌다. 문제는 학교가 아이들의 등교 시간을 8시 20분부터 40분 사이로 제한하고 있어 동 시간대에 마을버스가 콩나물시루가 된다는 사실. 우리 아이는 나를 닮지 않아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기 때문에 비좁아 터진 마을버스를 타는 일이 보통 고역이 아니다. 그래서 차로 10여 분 걸리는 학교 근처까지 태워다 준다. 남학교들이 등교 시간을 제한하는 이유는 아이들을 일찍 교실에 들여보내 봐야 사고가 나기 일쑤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아이 둘을 등교시키고 집에 돌아오면 8시 40분 남짓 된다. 이제부터 온전히 나의 시간이지만 물론 할 일은 쌓여 있다. 일찍 일어났지만 나의 허기를 채울 시간은 없었기에 그제야 아침을 챙겨 먹는다. 보통은 요구르트 종류나 떡, 누룽지 같은 간단한 요깃거리로 때우지만 어제처럼 술 한 잔 걸친 날은 사발면이라도 끓여먹곤 한다. 그리고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를 하고, 건조대에 빨래가 말랐는지 확인하고 남아있는 빨래 거리들을 세탁한다. 오늘은 비가 온다고 예보가 있었고 날이 잔뜩 흐려 건조대에 빨래가 아직이다. 밀린 빨래 거리도 많지 않아 오후에나 세탁기를 돌릴까 싶다.
호두는 늘상 낮 시간에 늘어지게 자는 편인데 내가 집에 있으니 자꾸 놀아달라 앵긴다. 처음엔 놀아도 줘 봤지만 강아지의 놀이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적당히 날 좋은 시간에 산책을 시켜주는 것 외에는 거리를 둔다. 내가 책상 앞에 앉으면 녀석은 입에 문 장난감을 "퉤" 하고 뱉은 후 소파 위에서 자리를 잡는다. 이 녀석과 나의 동거 시간이 길어졌지만 우리도 이제 서로의 일상을 존중하게 된 것이다. 방금 사냥을 마치고 기분 좋게 늘어져 있는 아프리카 평원의 사자처럼 누워 자는 녀석을 볼 때마다 이 집의 주인은 누구일까 궁금해진다.
나의 전반기 6개월의 중요한 미션은 대략 3가지로 나뉜다. 첫째 5분 대기조. 예체능을 전공하는 아이들은 스케줄이 시시때때로 바뀐다. 또한 학업과 실기를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관리는 필수가 되었다. 연예인처럼 엄마가 로드 매니저로 따라붙는 팔자 편한 아이들도 많지만 스스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어렵게 공부하는 아이들도 제법 있다. 우리 아이는 온전한 후자라고 보긴 어려웠고 틈나는 대로 그 역할을 수행하던 내가 급기야 전업으로 5분 대기조가 된 것이다. 문제는 내가 담당할 녀석이 둘이기 때문에 절묘하게 시간이 겹치면 아내가 투입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둘째 과외 선생. 대한민국 교육계에서 무한 경쟁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며, 그 진실은 예체능계를 비껴가지 않았다. 무용을 하는 큰애는 어려서부터 학과성적이 우수한 편이라 그것이 가장 큰 경쟁력이 되었다. 그래서 공부를 놓을 수가 없었다. 무용은 학과성적이 많이 나빠도 실기 재능이 우수하면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는 길이 있는 편이지만, 우리 아이는 늦게 무용을 시작한 탓에 공부에 매진하였다. 시험 전날 모르겠는 걸 가끔 물어올 뿐 이 아이에겐 과외선생으로서의 아빠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둘째는 달랐다. 특히 둘째가 준비하는 미술 분야는 학과성적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홍대 미대는 비실기전형으로 실기시험 없이 학과성적 중심으로 학생을 선발한다.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경향이 주류가 되면서 학업성적이 시원찮았던 둘째에게는 내가 전담 과외교사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앞서 와 같이 사연이 많아 따로 소개하기로 한다.
셋째 가사도우미. 아내는 8년 전 육아휴직을 했던 것을 제외하면 20년 동안 맞벌이 주부의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집안 청소나 분리수거 등 내가 이것저것 분담을 하긴 하지만 사실 최근 몇 년간은 아이들을 챙기는 것 외에 가사노동은 대부분 아내의 몫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아내에게 고마운 때보다는 불만인 때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 불만의 주체는 나와 아이들을 가리지 않았다. 결국 나는 가사의 상당 부분을 떠맡기로 하였다. 내가 직접 장을 보고 요리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동안도 우리 집의 주메뉴는 배달음식이었다. 아내를 비난할 마음은 없다. 그녀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기에. 다만 살림이 점점 늘어가면서 정리되지 않고 방치된다는 인상이 너무 강했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이렇게 나의 일상은 온갖 육아와 가사로 넘쳐난다. 그럼에도 나는 회사에 안 간다. 그래서 불특정한 짬이 날 때마다 많은 것을 즐기려 한다. 일단은 명상과 요가... 2년 전부터 명상 앱 등을 활용해서 틈나는 대로 명상을 즐기고 있다. 이것을 이제 정기적으로 꾸준히 누리려 한다. 그리고 요가는 몇 차례 학원이나 사내 동호회를 다녀봤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내게는 그것을 즐길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이젠 시간이 생겼고 우리에겐 유튜브가 있다. 온전한 휴식기가 되는 후반기에는 이걸 보다 본격화해 볼 계획이다.
오늘의 감상,
오전 시간에 집에 있는 시간이 늘다 보니 아침을 챙겨 먹다가 무심코 TV를 켜 보곤 하였다. 2년은 족히 지났지만 방송 시기엔 엄청난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들이 그 시간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즐기지 않는다. 특히 주변에서 요즘 이게 얼마나 재밌는데 안보냐는 둥의 이야기가 들려오면 절대 보지 않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그런데 아침에 흘러나오는 그런 부류의 드라마를 보다가 몰입까지는 아니지만 흥미를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유는 드라마 주인공 누구에게도 몰입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그 배우의 연기 탓이 아니고 어떤 캐릭터에도 투영될 수 없는 늙고 지친 나의 탓이다. 그런데 전업주부가 된 요즈음 그 생각이 바뀌고 있다. 나는 넷플릭스로 아침 시간에 '미스터 선샤인'을 딱 한편씩만 본다. 큰 화면의 TV로 보지 않고 휴대폰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밥 먹으면서 또는 밥 치우면서 또는 설거지하면서 또는 소파에 누워 자유롭게 보려 함이다. 영화관에 앉아 몰입하듯 보고 싶은 드라마는 아니지만 심심한 일상에 쏠쏠한 재미를 더한다. 이 또한 휴직이 누리게 해 준 여유라고 생각한다. 과연 열 달 동안 몇 개의 드라마를 섭렵할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