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10월19일로부터

해방일지, +162일(2022.10.19)

by 낙산우공

무려 20년이 흘렀다. 강산이 두 번 바뀐다는 기나긴 시간 동안 내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렸고 아내의 몸에서는 아이 둘(?)이 나왔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일이 과연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까 항상 의구심이 들었던 내게도 그 기회는 찾아왔고, 그 덕에 나는 20년을 살아냈다. 덕분이라는 말은 그저 인사치레로 꺼낸 말이 아니다. 인생에서 만약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질없겠지만, 행여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혹은 다른 이와 다른 가정을 꾸렸더라면 과연 지금과 같은 평온한(?) 삶을 살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말로 만에 하나 더 화려한 삶이 예비되었을지는 몰라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었을 거라고 감히 지금의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나는 그만큼 지금의 결과에 만족한다. 만족의 의미는 완벽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소박한 내가 누리기에 충분했다는 의미다. 19주년이나 20주년이나 특별히 다를 것은 없었다. 하지만 꽉 찬 20이라는 숫자가 주는 감상이 다르기에 우리는 10, 20, 30, 50주년 등등의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리라.


바쁜 일상에 치여 지난 주말을 흘려보냈다. 장모님의 생신 다음날에 결혼을 한 탓에 결혼기념일이 있는 주에는 꼼짝없이 처가에 간다. 이 기막힌 인연이 고마운 건 장모님의 생신 탓에 나는 결혼기념일을 놓치는 경우가 없다는 것. 이번에도 그랬다. 지난 토요일에 장모님 생신 모임에 가면서 비로소 곧 결혼기념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념일이나 이벤트에 유난히 무심한 아내를 두었지만 그래도 20주년을 대충 보내기에는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침 결혼기념일 하루 전날 모두의 일정이 맞아 집 근처 호텔 뷔페에 예약을 했다. 내 일정이 가장 애매했는데 무슨 조화인지 밤늦도록 업무상 대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요행히 나만 제외되는 행운이 발생했다. 운명은 언제나 운명적이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공교로움을 동반한다. 그 기막힌 우연을 무심코 지나치거나 포착하지 못하는 인간의 우매함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게 막 중간고사가 끝난 둘째와 이제 중간고사가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짬을 낸 효심(?) 깊은 큰애를 데리고 아내와 근사한(?) 저녁을 즐겼다.


연말에 한번쯤은 호텔 뷔페를 다니던 게 꽤 오래전 일이었는지 아이들은 오랜만의 특급호텔 분위기에 상기되었다. 사실 그동안 연말이면 더 값비싼 스테이크 하우스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뷔페가 주는 매혹은 남다르다. 다채로운 메뉴와 선택의 기쁨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두 시간 넘게 본전(?)을 뽑고 오는 길도 유쾌했다.(심지어 나는 중간에 한번 화장실에 다녀왔다. ㅠㅠ) 식단 조절에 대한 부담감을 한번쯤 내려놓고 마음껏 즐긴 포만감이 주는 면죄부 때문이리라.


그리고 오늘, 아이들은(물론 큰아이의 주도로) 우리 몰래 20주년 케이크를 특별히 주문했고, 그래도 기념일에 와인 한잔은 해야지 하면서 집에서 고기에 와인을 들이켜던 우리 앞에 커다란 초 하나가 꽂힌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스무 살에 열일곱... 다 커버린 아이들의 얼굴에 어릴 적 장난기가 그대로 배어 있었다. 그 얼굴을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20주년 기념일은 완벽했다.


와인 몇 잔에 취기가 느껴졌는지 모르지만 나는 오늘 흠뻑 기뻤고 흠뻑 행복했다. 내가 살아낸 20년은 나를 구속했는지 몰라도 오늘만큼은 나를 완벽하게 해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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