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일기, -5일(2021. 4. 28)
10개월을 일주일씩 끊어보면 대략 43주 내외가 될 것이다. 한주가 훌쩍 지나간다는 사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으므로, 10개월의 휴직을 시작하기 전에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막연히 휴직을 생각하고 있을 때 계획했던 것들은 막상 휴직을 감행한 뒤에는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치밀하게 버킷리스트 같은 것을 정리하고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난 나름 메모와 기록을 즐기는 편이지만 그렇게 틈나는 대로 적어놓았던 계획들은 생각보다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카테고리도 워낙에 다양해서 그걸 일일이 찾아볼 바에는 곰곰 생각을 다듬고 기억을 돌이키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지난 월요일부터 시작된 마지막 휴가 기간을 아주 알차게 활용하고 있다.
일단 집에서 사용하는 개인 PC를 항상 켜 놓고 있다. 잊고 있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을 때 지체 없이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물론 휴대폰과 태블릿도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PC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다양한 장치들을 활용하여 흘려버릴 수 있는 기억들을 잡아놓으려는 것이다. 이런 기억들이 요 며칠 사이 꾸물꾸물 올라오고 있으며 그것들은 차곡차곡 메모장에 옮겨지고 있다.
물론 나의 휴직은 온전히 가사에 전념하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결코 한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짬을 내어 무언가 오래전에 바랐던 일들을 이번 차에 해치우고 싶은 건 앞으로 내가 생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순간까지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이번의 기회도 언감생심 꿈꾸기 힘들었다는 것은 대부분의 중년 가장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이유로, 혹은 조직 내에서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또는 휴직 기간의 무료함과 소외감을 견디기 어려워.... 등등 다양한 핑계로 나와 같은 짓은 엄두조차 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순간순간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백 번을 떠들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엄청나다. 삶에서 브레이크를 경험하는 일은 그만큼 흔하지 않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그것을 밟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자발적으로 내 삶을 멈춘 것이다. 그로 인해 나에게 돌아온 시간은 백만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값어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휴직을 시작하지도 않은 시점에서 나는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나의 휴직을 허락해 준 곳에서는 아직도 불쑥불쑥 메시지가 올라온다. 아직 공식적인 휴직 기간이 시작되지 않았기에 나는 잠시 휴가를 내었을 뿐 직장에 매인 몸이다. 따라서 그들이 공유하는 업무 메신저 방에서 퇴장할 수 없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울려대는 “까똑” 소리에 나는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며 반응한다.
10개월의 휴직 기간이 펼쳐지기 불과 며칠 전, 난 직장에서의 업무를 모두 마무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메시지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21년의 관성이란 이렇듯 인간의 영혼을 잠식해 온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깜짝 놀라는 순간은 찰나일 뿐 그 이후에 누리는 행복감도 쏠쏠하다. 내가 포함되어 있는 단체 메신저 창 중 나의 직장과 연관되어 있는 곳은 딱 세 곳이다.
그들 사이에서는 가끔 유사하거나 동일한 내용의 공지도 중복적으로 올라올 뿐 아니라 특정인을 염두에 둔 업무 관련 사항들도 종종 올라온다. 그런데 오늘의 난 그렇게 올라오는 수십 개의 공지 또는 업무지시에서 완벽하게 자유롭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새삼 현실을 실감케 해주어 불쾌함은 순간일 뿐 행복감이 꽤 길게 여운을 남기고 있다. 물론 일주일의 워밍업 시간이 지나고 본격적인 휴직에 들어설 때쯤이면 나는 이방에서 완전히 퇴장할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아주 잠시 느끼는 긴장감과 해방감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상승시켜 주는 것인지, 아무튼 나는 짜릿하다.
이런 워밍업의 준비 시간도 곧 마무리될 터이니 나는 부단히 나의 짧은 브레이크를 만끽하기 위해 나설 것이다. 내 복잡하고 바쁜 일상에서 직장을 빼고 나면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생기는지 실험해 볼 것이다. 현대인의 삶에서 직장이 부과하는 정신적 스트레스의 양이 단순히 업무시간으로 환산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 예상하지만, 나는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 자유의 양과 질이 결코 요란하고 거창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다.
오늘의 감상,
휴직을 앞두고 내게 한가한 시간이 허락되었을 때 꼭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정리하다 보니, 의외로 나의 계획은 매우 현실적이고 가정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개인적인 자아실현을 위한 계획들도 꽤 있었지만 일상에 치이는 맞벌이 가구의 삶에서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들이 상당수 드러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발코니에 쌓인 10년 넘은 짐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기, 제구실을 못하는 싱크대의 문짝을 비롯하여 전면적인 주방 수리 공사, 점점 묵은 때를 처치하기 힘든 욕실의 리노베이션, 열대야가 기승을 부릴 여름철 냉방장비 구비.... 이 모든 것에는 상당한 금전적 지출을 수반할 뿐 아니라 많은 시간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기에 쉽게 벌이지 못한 일들이었다. 특히 집을 옮기겠다는 계획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더더구나 망설였던 일이다. 그러나 나의 파격적인 무급휴직으로 인해 당분간의 이사계획은 전면 철회되었다. 따라서 문제는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인테리어 공사를 피하면서 최소한의 비용으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내 아내의 불만을 무마시키면서 쾌적한 주거환경을 만들기 위한 나의 프로젝트는 이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