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량의 법칙(2012.07.04)
직장생활을 하면서 흔히 쓰는 용어 중에 '캐파'라는 것이 있다. '저 친구는 캐파가 안돼... 누구는 캐파가 대단하지...' 등등 주로 누군가를 평가할 때 쓰는 표현으로 긍정/부정에 공히 사용되는 단어다. 처음 그 말을 접했을 때, 맥락상 의미는 파악했지만 도대체 저 국적불명의 단어를 만들어 낸 어원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아마도 capacity 아니면 capability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이 들지만, 용례를 파악하지 않은 이상 사전적 의미는 대동소이하나 그 쓰임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단, capacity는 기술 명세서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주로 기계의 용량을 표현할 때 쓰는 듯하다.
그것이 둘 중 어느 것이건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무슨 전문용어처럼 고착된 '캐파'라는 말이 사람을 지나치게 기능적으로 판단하는 잣대가 된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할 뿐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을 들이대면서 다분히 계량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무래도 어색하다.
언젠가 들은 얘기 중에, 사람은 개인별로 성관계의 한계 횟수가 있다는 말이 기억난다. 물론 근거 없는 얘기지만 사람마다 상한이 있어서 그 관계의 밀도에 따라 기능을 상실하는 시기가 달라지는다는 것이다. 비유가 적절치 않다면 핸드폰을 예로 들자. 예전에 유행하던 폴더형 휴대폰은 폴더를 펴고 접는 행위가 일정 횟수 반복되면 제기능을 못하게 된다고 한다. 예컨대 1만 5천 번이 그 한계 횟수인 휴대폰이라면 사용기간이 1년이건 10년이건 1만 5천 번을 열고 닫았다면 수명이 다한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다면 대부분의 사용자는 불필요하게 휴대폰을 여닫는 행위를 자제할 것이다. 물론 뻘쭘한 상황을 모면하는 수단으로 우리는 무수히 휴대폰을 빼어 들지만 말이다. 충방전을 반복하는 횟수에 따라 수명이 줄어드는 충전지도 비슷한 예가 될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휴대폰 충전지 수명을 연장할 목적으로 충전지를 랩으로 칭칭 감아 냉동실에 보관하는 민간요법(?)이 유행하기도 하였지만, 100만 원 상당의 스마트폰을 3년 약정(요즘은 2년?)으로 갈아치우는 요즘에 충전지 수명을 고민하는 이는 흔치 않으니 적절한 비유가 아닐 듯도 싶다.
어쨌든, 한 인간의 캐파가 성기능, 폴딩 기능, 충전 기능과 마찬가지로 저마다 한계용량을 갖고 있다면, 그 사용의 집중도(횟수)에 따라 효율적인 성과를 내고 그 결과 주변의 인정을 받고 급기야 고속승진과 사회적 성공이라는 달콤하지만 고달픈 보상을 받았다고 하여 자만하지 말지어다.
당신의 캐파는 그 수명이 다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스마트폰은 그 화려하고 스마트한 기능만큼이나 엄청난 량의 전력을 소모하는 하마가 되고 있다. 스마트한 기능의 덕분으로 우리는 충전지의 남은 전력을 막대기 개수에서 100분지 1의 퍼센티지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지만, 구형폰의 막대기 하나가 남은 순간 언제 꼴깍할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기분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리고 당신의 캐파도 이제 막대기 하나가 남아 있는 상황일 수 있다면, 지금의 성취와 우월감이 그저 흐뭇하게 즐길 일이기만 한 것인가?
인간의 수명이 세 자리로 달려가고, 경제성장은 한자리마저도 불안해져 가는 21세기 초입에... 우리는 일찍 성공을 이룬 많은 사람들이 남은 인생을 과거에 집착하며 방황하는 것을 보곤 한다. 샴페인은 인생의 황혼기에 터트려야 한다. 캐파는 모두에게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화려한 초년운은 초라한 노년기에 닿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의 피크(peak)는 찍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면서 피해 가는 것이라고... 단명의 천재가 아니라면 말이다. 20대에 '시민 케인'을 만든 오손웰즈는 그나마 천재였기에 버티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