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10, 마지막 애도의 글
아버지의 이야기를 빼놓고 죽음에 대한 기억을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부터 시작했다면 도대체 어디쯤에서 마무리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이야기를 가장 먼저 쓰려한 것은, 내게 죽음을 이야기하겠다는 결심이 선 것이 내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쉰 해를 넘긴 내 삶에서 이분의 존재와 그의 죽음을 넘어서는 영향력은 없다. 나의 삶에 대한 태도와 세상에 대한 시선은 온전히 그분에 대한 기억이 장악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갓 스무 살에 겪었던 아버지의 사망과 그 이후의 혼돈은 30년을 훌쩍 넘은 오늘까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1991년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둔 12월 22일은 일요일이었다. 주말마다 산에 다니시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아버지는 차일피일 미루던 동창들과의 송년회를 겸하여 서울 인근으로 등산을 가셨다. 등반 후에 술 한잔을 걸치는 문화가 여전했던 대한민국에서 송년회 술자리를 피하기 위해 차를 가져가려 하셨으나 공교롭게도 그날 새벽 아버지의 차바퀴에는 펑크가 나 있었다. 그날 오후 유난히 볕이 좋았던지 차 지붕 위에는 길고양이 한 마리가 늘어지게 단잠에 빠져 있었고, 발코니 창문으로 그 고양이를 발견한 나의 기분이 묘하게 섬뜩했던 것은 끔찍한 아버지의 사고를 겪은 내 기억의 조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늦은 시각, 친구들과 가볍게 술 한잔을 하고 집에 온 스무 살의 나는 샤워를 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휴대폰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모처럼의 동창모임이니 술자리가 길어지겠거니 생각했던 우리 집에 갑작스럽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밤늦게 남의 집에 전화를 하는 일이 잘 없었던 유선전화의 시대... 드라마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늘 벨소리에 민감했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어머니께서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격정의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전화가 걸려온 곳은 병원이었고 전화를 건 사람은 경찰이었다.
큰형과 어머니가 허둥지둥 나갔고 누나와 나는 불안감을 떨치려고 애쓰며 각자의 방에서 숨을 죽인 채 어머니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잠시 앉은 채 벽에 기대어 잠이 들었고, 꿈에 아버지가 등장하셨다. 아버지의 사고소식을 전하는 전화가 걸려왔을 때의 나의 모습과 흡사하게 꿈속 아버지는 샤워를 마치고 수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오셨다. 발을 닦으시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안에 경사가 났으니 잔치를 열자고... 꿈은 현실과 반대라는 속설은 나의 꿈에서도 비켜가지 않았다. 그 꿈에서 깬 이유는 또다시 울린 전화벨 소리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전화기 너머에 어머니가 계셨다. 여전히 울음 섞인 목소리였고, 아버지께서 의식이 없으시고 돌아가실 것 같다는 말씀이셨다. 나는 무엇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득함을 느꼈다. 그곳이 현실의 세계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급박한 소식을 전해 들었던 이웃집 아주머니께서 찾아오셨고 나는 엄마가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아주머니께 혼쭐이 났다. 돌아가실 것 같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말 하는 것 아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화를 내시는 게 아니었다. 이 믿을 수 없는 참담한 현실에 역정을 내고 계셨다.
나는 그 아주머니를 붙들고라도 울고 싶었지만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군에서 소식을 듣게 될 둘째 형 생각이 났고 아무 경황없이 나간 엄마와 형을 위해 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한 살 터울의 누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부탁하신 무엇인가를 챙겨서 누나와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병실에 누워계신 아버지는 의식이 없으셨고 호흡기를 비롯한 온갖 의료장비에 기대어 숨을 연명하고 계셨다. 교통사고였다. 속도를 알 수 없는 충돌차량의 바퀴는 13미터의 스키드마크를 남겼다고 한다.
아버지의 감겨진 한쪽 눈에는 감춰지지 않는 멍자욱이 보였다. 수술실에 들어가신 지 한 시간도 안돼 대충 봉합하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손을 쓸 수 없다는 의사의 판단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이었어도 그랬을까 궁금해질 때가 많다. 서울 외곽의 이름 없는 병원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태이셨을 것이다. 왜 그곳으로 모셨는지 다른 선택은 없었는지 스무 살의 나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아버지는 곧 운명하실 것이라고 단정 지어졌고 결국 그렇게 숨을 거두셨다.
집으로 돌아와 사고소식을 접한 친지분들의 빗발치는 전화를 받았고 새벽 첫차로 올라오신다는 큰고모부를 마중하기 위해 남부터미널에 나가야 했다. 누나는 계속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른 아침 터미널에서 만난 큰고모부께서는 아버지보다 스무 해는 더 사신 집안의 어른이셨다. 백발이 성성하셨는데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셨지만 학식과 덕망을 갖춘 분이셨다.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꼬박꼬박 절을 받으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그분은 그날 택시 안에서 계속 우셨다. 다 큰 남자어른이, 아니 할아버지가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울음을 우는 걸 본 적이 있는가?
가부장사회의 유교문화에서 남자의 울음이 생소하겠지만 그 울음은 여인네의 눈물과는 달랐다. 그것은 곡이었지만 진심이 어려 있었고 그래서 더 가슴을 후벼 파는 묵직함이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택시기사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우시는 중에 병원에 도착했다. 거기서 나는 또 한 번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맛보고야 말았다. 고모부를 모시고 올라간 병실에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엄습해 오는 불길함을 억누르며 데스크를 찾았고 무심한 직원의 매몰찬 대답을 지금껏 잊지 못한다.
"어젯밤에 들어온 노인네? 죽었어."
그가 지금의 나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을 어린 나에게 중년의 남성은 딱 그렇게 말했다. 노인네... 죽었어... 지금의 나였다면 멱살을 잡았을 일이었겠지만 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황급히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집 근처 병원을 수소문해서 아버지를 그곳으로 모셔갔다고 한다. 나는 다시 택시를 잡아 타고 집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그 택시 안에서 고모부는 진짜 울음을 우셨다. 그 고모부께서는 그 뒤 몇 년을 못 사셨지만 나는 지금도 그분을 잊지 못한다. 아버지도 고모부의 울음 덕분에 조금은 위로가 되셨을 것만 같았다. 그때 아버지의 연세는 우리 나이로 오십 여섯이었고, 만 55세 생신을 맞으신 지 불과 한 달 뒤였다.
내 아버지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건 1936년 11월에 태어나셨다. 1남 3녀의 외아들이셨고 셋째이셨다. 제법 크게 농사를 지으시던 할아버지께서는 서른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셨다. 그리고 내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중학교 2학년 때 1년을 휴학하셨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친척 어른께 들었지만 아버지는 그저 당신이 공부를 못해서 그랬다고만 하셨다.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형제 중에 재산이 가장 많았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큰어머니께서 인물이 좋으셨던 할머니를 재가시키고 할아버지 재산을 차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할머니께 의지할 분이라고는 하나뿐인 남동생(아버지의 외삼촌) 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학교를 휴학하고 어린 외삼촌과 농사를 지으며 할아버지의 땅을 지키셨다는 얘기다. 아버지의 외가 친척분들께 들은 이야기였다.
아무튼 아버지는 홀어머니를 모시며 시골에 사셨지만 농사를 지을 만큼 건장한 편이 못되셨다. 키는 컸지만 할아버지와 같은 기골은 타고나지 못하셨다. 할아버지는 장사 소리를 들을 만큼 건장한 체구에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성격이 불같은 분이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말 한마디 변변히 못 나눠볼 만큼 할아버지를 무서워하셨단다. 대개 이런 부류의 남성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편이다. 내 아버지가 그랬다.
아버지는 혹독한 시집살이에 눈물 마를 날이 없던 내 어머니를 밤마다 다독이셨지만 할머니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어머니 편이 되어드리지 못하셨다. 그렇게 모진 시집살이를 했던 어머니는 막내고모와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지만 나의 막내고모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아무튼 할머니를 모시느라 서울로 올라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셨던 아버지는 할머니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가족 모두를 데리고 상경하셨다. 1960년대 후반에는 흔한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서울내기 다마내기가 되었다.
내 아버지가 혈혈단신으로 상경하셔서 적당히 식솔들을 건사하고 적당히 재산을 모은 이야기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너무나 흔해빠진 소재라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그 흔해빠진 삶을 살았던 흔해빠진 사람들 중에 한 명이라는 것만큼은 남기고 싶다. 그 흔해빠진 사람들을 우리는 위대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던가... 내 아버지가 위대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건 당신의 욕망을 누르고 당신의 가족을 돌보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모든 아버지가 그러했다면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는 이야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은 '아버지의 부재'가 어떤 건지를 온전히 배우는 시간이었다. 이것만큼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절대자(?)가 사라진 자리는 아무도 대체하지 못했다. 내 아버지가 완전무결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아무도 대신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직 독립하지 못한 자녀들을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주위에 전가하기 시작했고, 그 당혹감은 그대로 우리 형제들의 몫이었다.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큰형의 부담은 가중되어 갔고, 그는 그 모든 걸 떠안으려다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아니 낭패를 보았다는 표현이 더 맞다. 55년 생애를 가족들에게 담보 잡힌 채 희생만 하고 가신 아버지에 대한 부채의식이 나에게도 무거운 짐이 되었다. 그것이 삶을 개척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가족관계를 돌이키기 힘든 지경으로 몰고 가는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만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은 내 삶 전체를 지배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많은 숙제를 남기셨다. 나도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한 여자의 남편이다.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은 나로 하여금 가족에 대한 강력한 애착관계를 만들게 했다. 나는 할아버지보다 18년을 더 사신 나의 아버지처럼 만 55세에 세상을 등지신 아버지보다 딱 18년만 더 살고 싶다. 그때가 되면 나의 아들(둘째)은 우리 나이로 마흔이 된다. 나는 스무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그보다 스무 해는 더 내 아들과 함께 할 수 있다. 그 간절함을 알게 해 준 분이 내 아버지시다.
돌아가신 분이 꿈에 나타나는 건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한 것이라고들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신 후 통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실 내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30년이 넘은 지금까지 꾸준히 내 꿈속에 나타나신다. 그건 내가 너무 어린 나이에 떠나가신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신 날은 어김없이 배겟잎이 흥건하게 젖었다.
내 아버지가 1991년 12월 23일 새벽에 세상을 뜨신 지 서른한 해가 되어간다. 이제 나도 아버지를 좋은 곳으로 보내드리고 내 딸과 아들의 온전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 두 주 전에 추석에 못 간 성묘를 다녀왔다. 오랜만에 아내까지 함께 하여 온 가족이 인사를 드렸다. 새벽같이 양재동 꽃시장에 들른 덕에 싱싱한 국화 한 다발도 함께였다. 그날따라 아버지 묻히시던 날처럼 비가 내렸다.
30여 년 전부터 아버지 생각이 날 때마다 듣던 노래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대신한다.
사망부가 - 정태춘
저 산꼭대기 아버지 무덤
거친 베옷 입고 누우신 그 바람 모서리
나 오늘 다시 찾아가네
바람 거센 갯벌 위로 우뚝 솟은 그 꼭대기
인적 없는 민둥산에 외로워라 무덤 하나
지금은 차가운 바람만 스쳐갈 뿐
아, 향불 내음도 없을
갯벌 향해 뻗으신 손발 시리지 않게
잔 부으러 나는 가네
저 산꼭대기 아버지 무덤
모진 세파 속을 헤치다 이제 잠드신 자리
나 오늘 다시 찾아가네
길도 없는 언덕배기에 상포자락 휘날리며
요랑 소리 따라가며 숨 가쁘던 그 언덕길
지금은 싸늘한 달빛만 내리비칠
아, 작은 비석도 없는
이승에서 못다 하신 그 말씀 들으러
잔 부으러 나는 가네
저 산꼭대기 아버지 무덤
지친 걸음 이제 여기와
홀로 쉬시는 자리
나 오늘 다시 찾아가네
펄럭이는 만장너머 따라오던 조객들도
먼 길 나던 만가소리 이제 다시 생각할까
지금은 어디서 어둠만 내려올 뿐
아, 석상 하나도 없는
다시 볼 수 없는 분 그 모습 기리러
잔 부으러 나는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