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가리는 집

휴직 일기, +22일(2021. 5. 24)

by 낙산우공

우리 집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종로구 창신동인데 그곳에 가면 지봉 이수광 선생이 살던 옛 집이 나온다. 이수광 선생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는 '지봉유설'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살아서 이조판서의 자리에 올랐고 죽어서는 영의정으로 추증되는 등 명문가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서도 승승장구한 대표적인 사대부였다. 한편으로는 청나라 연경을 사신으로 다니면서 '천주실의'와 같은 서양학문을 접하고 이를 국내에 소개한 실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인물이 머무른 집으로 보기엔 참으로 초라한 세 칸짜리 초가집의 이름은 '비우당(庇雨堂)'이다. 말 그대로 비만 가리는 집이다. 명문가 출신의 고관대작이 살았던 저택으로는 충격적이지만 그가 얼마나 검박하고 소탈한 삶을 살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본래의 집터에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바로 옆자리에 복원해 놓았다는 현재의 비우당은 보잘것없는 초가집이지만 그 단출함이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의 모습을 닮았다.


내가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 지 8년째인데 비우당에 들른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창호지로 바른 문짝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어 문화재로서 관리는 형편이 없었지만 경제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휴직을 선택한 나에게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집이었다. 그래서 꼭 한번 가보려 하던 곳이다. 아직도 빗방울만 피할 수 있는 집에 살고 있는 이들이 있겠지만 대다수의 현대인에게 비를 피하는 일은 큰 걱정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비를 피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잊고 살아간다.


휴직을 한지 한 달이 되어가는 지금도 나는 밤마다 사나운 꿈들을 꾼다. 유난히 꿈을 많이 꾸는 편이기도 하였지만 요즘 꾸는 꿈들이 대부분 나의 심리적 불안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쉬려고 시작한 휴직이지만 아직 내 마음은 쉴 준비가 덜 되었던 것 같다. 몸으로는 많은 것을 하고 있지만 마음의 휴식은 요원하다. 그것이 순간적으로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21년 동안 몸에 베인 노동자의 삶이 한순간에 백수건달로 바뀌는 게 어디 쉽겠는가? 관성의 법칙은 우주만물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10개월의 휴직으로 나의 삶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결국 도루묵이 되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것인가? 나이 오십에 새로운 삶을 설계한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저 10개월의 휴식기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한 일이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릿속을 맴돌고 있으니 어찌 나의 잠자리가 평안하겠는가?


물론 이렇게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들을 애써 지우려고 노력하진 않는다. 다만 내가 너무나 많은 생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는 것만큼은 또렷하게 인지하려고 할 뿐이다. 일단 나의 휴직 초반기는 비우는 일이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어지러운 생각들을 비우려고 하다 보면 그 생각 속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주변부터 정리하고 있다.


처치 곤란했던 세간살이를 비우고, 오래된 짐들을 비우고,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면서 불필요한 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법을 조금씩 터득하려고 한다. 그렇게 주변을 비우다 보면 내 머릿속도 비워질 날이 올 것이고 그렇게 홀가분한 상태가 찾아오면 나의 미래도 보다 뚜렷하게 보일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이다. 이수광 선생의 비우당이 어쩌면 모든 불필요한 것을 비우고 나니 부엌 1칸, 방 2칸 위에 초가지붕을 얹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를 가리는 집은 결국 모든 것을 비운 집이었다.




오늘의 감상,

회사에 다닐 때에도 야근을 싫어하였다.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했던 것도 있지만 최소한 저녁만큼은 의무적인 일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었다. 그런데 요즘 나의 저녁은 늘 바쁘다. 늦은 오후에 둘째를 픽업해 오고 언제나 들쭉날쭉한 스케줄의 큰아이를 데려와야 하루가 마감을 친다. 둘째가 미술학원에 가는 금, 토, 일은 오후 5시 반에 끝나는 일요일을 빼면 밤 11시가 다 되어야 비로소 자유롭다. 그 와중에 둘째의 수행평가는 대면 수업이 있는 주간에 몰리는 탓에 이번 주는 화, 수, 목, 금, 월 연짱 수행평가를 치른다. 아이의 학과 수행평가를 위해 부모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둘째를 키우며 알게 되었다. 오늘 하교하는 차 안에서 둘째가 역사 수행평가 안내장을 들이밀었을 때 나는 묵묵히 참던 화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제발 운전 중에는 건드리지 말라고. 그 화는 애먼 아내에게까지 전이되었다. 휴직의 장점은 회사에 가지 않는 것이나 휴직의 단점은 공과 사가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출근하지도 않지만 퇴근하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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