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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Apr 06. 2023

바람의 언덕

수학여행객을 만나다

거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 신선대와 바람의 언덕을 딱히 왜 가야 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곳을 다섯 번 정도는 온 것 같다. 유럽에나 있을 법한 풍차는 거제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푸른 초원의 언덕과는 묘하게 그림이 나온다. 그 바람에 거제 9경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덕에 모든 관광객들의 단골코스가 되었다.


오늘도 그랬다. 4월의 목요일을 딱히 성수기로 볼 수 없듯 주차장은 한산했고 아들과 나는 여유롭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오는 길에 관광버스를 만나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중턱쯤 올라왔을 때 아들이 힘겨워 하기 시작했다. 정상의 풍차 주변엔 한 무리의 학생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었고 아래쪽 초원 위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아들은 올라가지도 내려갈수도 없어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고 결국 도로 주차장으로 돌아와 공황장애 응급약을 복용하고야 조금 진정이 됐다. 조금만 판단이 늦었어도 아찔할 뻔 한 상황이었다. 공황발작은 항상 예기치 못한 순간에 급격한 속도로 들어오는 특징이 있다. 벌써 6개월이나 경험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둔감하다.


오늘 상황의 발단은 옥포수변공원에서 시작되었다. 숙소에서 가까운 그곳에 처음 들렀을 때 대우조선의 위엄에 압도당했던 나는 전날의 비바람 때문에 제대로 구경하지 못한 광경을 눈에 담느라 공원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신경 쓰지 못했다. 아들은 공원에 올라와서 채 3분이 되지 않아 서둘러 내게 돌아가자 말했다.


다음코스였던 학동몽돌해변에서도 몇 안 되는 관광객이 지나가며 떠드는 이야기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더니 바람의 언덕에서 결국 사달이 났다. 공황증상은 대개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폐쇄된 공간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조용하고 한적한 남해바다로 한달살이를 오게 된 것이었다. 아들은 특히 우울증 진단을 받은 이후 어릴 적 상처가 있는 학교에서 공황발작이 심했다.


첫날 이동하면서 붐비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아이를 챙겼는데 여행에 들떠서인지 아무렇지 않아 했다. 거제에 도착한 이후로 별로 돌아다니지 않았고 항상 내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또 방심을 하고 만 것이다. 간사한 인간은 이렇게나 어리석다. 어젯밤 아들과 감상한 영화 “아바타-물의 길” 엔딩장면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아빠는 (가족을) 지킨다. 그것이 존재의 이유”


이 대사를 들으며 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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