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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Apr 11. 2023

푸른나무재단

대전통영고속도로엔 차가 없었다.

서울을 떠난 지 꼭 7일 만에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학업중단숙려제는 학교에 안 가는 대신에 주 1회 상담을 받아야 하는데 아이는 학교폭력 피해구제를 위해 설립된 푸른나무재단을 선택했다. 재단에서는 한차례 접수면담을 통해 아이의 상황을 점검한 뒤 적합한 상담사를 배정하였고 그렇게 첫 상담을 하러 가는 날이었다.


아들은 6개월 남짓 병원부설 상담치료센터에서 상담치료를 진행하였지만 3개월 무렵부터는 지속적으로 상담을 거부하여 애를 먹였다. 다양한 핑계를 들이대며 상담 당일에 나를 당황시키는 일이 열에 일곱은 되었다. 이런 형편에 상담치료의 효과를 신뢰할 수 없었고 결국 치료를 중단하려 했을 때 아이가 푸른나무재단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방송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곳이었는데 학교폭력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아이의 아버지가 사재를 털어 설립하고 운영하는 곳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폭피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아들이 이곳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자책하였다.


그렇게 처음 상담을 받으러 가는 날, 아이는 거제에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내내 잠을 잤다. 한 시간 가까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야 한다는 긴장감이 아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상담사 선생님은 젊은 여성분이었다. 아이를 상담실에 들여보내고 예정된 40분을 넘기고도 나오지 않을 때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예정시간을 5분 이상 넘겨 아이가 나왔고 다시 10분의 부모면담을 진행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전에 받던 상담치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아직 섣부른 기대를 할 단계는 아니지만 영리를 추구하는 개인병원의 시스템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이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려 하지도 않았고 대책 없이 아이의 일상을 물어보며 답답한 문답을 이어가지도 않았다.


아이가 정상적인 일상을 회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10회라는 상담 횟수를 정해 놓고 진행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뭔가 전문적이고 특화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이의 느낌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오늘의 문제는 상담장소가 서울이라는 것이었다.


답답한 서울이 싫어 먼 남해까지 한달살이를 갔지만 집에 있는 반려견도 보고 싶고 엄마도 만날 겸 오늘은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려던 참이었다. 물론 다섯 시간의 장거리운전으로 지친 아빠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었을 게다. 그런데 아들은 낯선 상담사와의 만남에 대한 부담에 더해 숨 막히는 서울의 공기에 결국 공황발작이 왔다.


심하지 않아 응급약을 먹고 진정이 됐지만 서울의 집에서 편하게 잠을 청할 상태는 아니었다. 잠시 집에 들러 교통체증이 덜해질 밤 9시에 다시 거제로 출발했다. 경부고속도로는 한밤중에도 많은 차들이 과속으로 달려 나를 긴장시키더니 대전에서 통영 가는 고속도로는 달리는 차가 거의 없어 나를 무섭게 만들었다.


특히 지리산의 영향권이라 느껴지는 중남부내륙을 지날 무렵에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데다가 커다란 달만 떠있을 뿐 주변이 온통 암흑천지라 긴장감이 더했다. 불쑥 고라니나 멧돼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 속도를 내기도 불안했다. 소변이 급하다는 아이 때문에 함양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출발했을 때 아들이 소름 돋는 말을 했다.


“아빠, 고속도로 달리는 내내 뒤에서 귀신이 따라오는 것 같았는데… 좀 전에 휴게소 화장실에서 마주쳤어.”


졸음을 쫓느라 화장실에 가지 않고 오랜만에 담배 한 대를 피웠는데 아들의 천연덕스런 귀신 얘기에 오싹해졌다. 아들은 팔목에 두른 염주(거제 첫날 해인사에서 구입한)를 꺼내서 돌리기 시작했고 덕분에 나는 도착하는 새벽 2시까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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