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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May 11. 2023

카페의 발견

내 새끼는 집에 가서 찾아라

아이가 우울증 때문에 학교에 못 가고 있어 대신에 교육청 위탁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학교폭력 등 다양한 이유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이 학교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시보호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우연히 알게 되어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는데 우리 아이는 적응기간이라 이번 주까지는 오전에만 참석한다. 아이를 오전 10시에 데려다주면 두 시간 정도 시간이 떠서 근처 카페를 찾는데, 마침 가격이나 커피맛이 나쁘지 않은 곳이 있어 매일 그곳에 들르고 있다.


시간이 무료할 것 같아 다이어리와 노트북 PC를 챙겨서 안쪽 구석자리를 일부러 찾아가는데 엊그제는 마침 젊은 남녀가 한쪽 구석을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아주 젊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젊은 남녀가 이른 시간에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있는 게 조금 미심쩍어 보였다. 그런데 남자의 목소리가 워낙에 커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사정인지 모두 알게 되었다. 40대 전후로 보이는 남자는 어떤 직장의 팀장이었고 마주 앉은 여자는 팀원인 듯했다. 그런데 왜 직장상사와 젊은 부하직원이 회사가 아닌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까? 이유는 이랬다.


젊은 여직원이 직장에서 무언가 문제를 일으킨 것 같았다. 남자는 징계절차를 이야기하면서 부사장을 들먹였다. 아마도 젊은 여직원이 부사장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고 사안이 가볍지 않아 징계위원회가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여직원이 하는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는데 남자 팀장의 목소리는 카페 전체에 울리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모두가 저 둘의 역학관계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굳이 구석자리를 찾아 들어간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사연은 적나라하게 전달되었다.


남의 회사에서 일어난 사건을 일일이 알고 싶지 않아 자세히 듣지도 않았다. 다만 남자의 목소리 때문에 도무지 무엇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어 짜증이 났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는 에어팟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순간에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의 무의식은 그들의 사연이 더 궁금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1시간이 넘도록 심각한 이야기를 하던 남녀는 11시를 넘기면서 분위기가 풀리는 듯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더니 다시 1시간 가까이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여직원도 마음이 놓였는지 팀장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강남의 한 골목카페에서 젊은 직장인들이 회사 이야기 한 것을 굳이 내가 여기에 옮기는 이유는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공감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묘한 관계에 시선이 꽂힌 탓이다. 남자 팀장은 시종일관 여직원을 몰아붙이면서도 자신이 팀장으로서 모든 걸 커버 쳐준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너는 일을 잘하는 친구고 나는 팀장이기 때문에 너를 지켜주는 게 내 일이다. 나는 내일을 할 따름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럴듯해 보였지만 직장생활 22년을 넘긴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 팀장은 지독한 '꼰대'였다. 약도 없다는 소위 '젊은 꼰대' 말이다. 그 팀장은 지나치게 말이 많았고 목소리가 컸다. 여직원의 생각이나 입장을 들어보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혼자 떠들었는데 그가 한 말 중에 내 귀에 가장 거슬렸던 문장은 바로 이거다.


"너는 내 새끼니까"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꿈틀 했다. 직장에서 가장 형편없는 표현이 가족타령인데 그중에서도 제일 질이 나쁜 게 '내 새끼' 운운하는 것이다. 그 설정은 20세기 그것도 쌍팔년도에 이미 소임을 다했다. 집에 가서 니 새끼나 챙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내 새끼'라는 말은 아무 데서나 지껄이는 게 아니다. 새끼를 거두는 부모의 심정을 아는 이라면 더더구나 말이다. 그리고 진정 부하직원을 자기 새끼처럼 아끼고 챙기는 상사는 그런 싸구려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 팀장은 '내 새끼'라는 말을 통해 지독한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자신을 드러냈다.


내가 그날 나의 '새끼'(?)를 챙기고 있었기 때문에 유난히 흥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사회적 관계에서 가족의 끈끈한 관계를 대입하는 모든 인간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아마도 가족관계에서조차 신중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가족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조직에서 얼마든지 훌륭한 인간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회사에서 새끼 타령은 개나 줘버려라. 20세기의 망령이여... 회사에서 새끼 운운하는 인간은 그냥 회사새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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