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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May 04. 2023

주류유감

천편일률 사회(2012.06.13)

대한민국은 늘 존재를 인식하는 수단으로 그럴듯한 스펙을 활용한다. 스펙이란 용어도 이상한 어감만큼이나 적절하지 않은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말이다. specification, 명세서, 설명서, 사양서. 제품이나 기술 등 복잡한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설계도를 글로 분해해 놓은 것을 일컫는 스펙이 개인의 화려한 능력을 사회적 검증수단으로 기술한 이력서 정도로 통용되고 있다.


직업적인 특성으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10여 년 동안 쌓인 명함만도 벌써 4번째 명함집을 채워간다. 그 명함을 들여다보면 소속기관, 직업별로 참 다양한 스타일을 발견하게 된다. 명함이 간결할수록 사회적 지위가 확실하고, 복잡할수록 설명해야 할 것이 많은 경우라고 보면 무리가 없다. 우리가 쌓아가는 스펙은 결국 개인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라도 치열한 취업난과 사회적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그만큼 살기가 팍팍해진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천편일률적인 스펙의 항목들이 도무지 다양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출신학교, 학위, 자격증, 어학성적, 학점 등 대한민국의 주류조직이 요구하는 필요인력의 명세는 신입이건 경력이건 가리지 않고 한 줄 답변을 강요한다. 신입은 말할 것도 없고 경력직원마저도 일방적인 기준에 따라 분류하고 평가하고 당락을 결정하는 행위가 과연 우수인력을 확보하는 최선의 방법인가 고민해 볼 일이다.


현장에서는 지원인력 중 하이스펙이 워낙 많아 변별력이 떨어진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을 스펙 쌓기에 내 몬 것은 인력채용을 하는 일선의 구태의연한 시스템에서 비롯되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서구사회를 신용사회라고 한다. 개인의 이력으로 신용등급을 나누고, 어떠한 담보 없이도 대출상환 이력만으로 높은 한도의 대출이 허용되는 사회. 신용불량에 빠지는 순간 사회적으로 매장당해 버리는 매정한 문화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철저하게 원칙을 고수하고 위반에 엄격한 그들의 문화는 정당성과 합리성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가치로 무장하고 있다.

 

담보 없이는 대출이 어렵고, 제2, 제3금융권으로 갈수록 고이율로 서민의 고혈을 빨아먹다가, 급기야 처절한 신용불량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순간, 사회적 부작용을 우려하여 다양한 정책적 구제수단으로 묻지 마 지원이 제공되는 대한민국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합리적인 사회라는 말이다.


습관적이고 고질적으로 순환채무에 빠지는 개인의 문제나, 그들을 악성채무의 유혹에 무분별하게 노출시키는 제도의 허점은 외면하고, 사후약방문,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가끔 보이지 않는 손을 의심하는 게 지나친 비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스펙은 금융기관의 담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스펙을 쌓은 것 만으로 기본적인 열정과 능력이 보증되니 말이다. 입증책임의 전환이다. 고용인이 피고용인의 우수성을 파악해야 함에도 대부분 피고용인의 스펙만으로 입증을 추정 내지 간주해 버리는 편리한 수단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입증책임의 전환은 주로 협상의 주도권에 따라간다. 시장논리에 따른 수요공급 곡선은 공급자(피고용희망자)의 주관적인 주장을 수용하기에는 지나치게 균형을 잃었다.


각설하고, 이런 바람직스럽지 못한 스펙 열풍은 다수의견, 주류만이 최선이고 소수와 비주류를 인정하지 않는 집단적 가치 중심의 사회로 신속하게 이동하고 있다는 중요한 단서다. 금융이력이 담보를 대신하듯이 공식적인 경력이 스펙을 대체하는 신용사회를 간절히 기다리며, 스펙의 보증력을 넘어서는 career portfolio와 reference check의 위력을 입증하는 산증인이 되고 싶다.

야망 혹은 억척


* Imag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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