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2014. 9. 19)
갱년기 증상인지 타고난 감수성인지 모르겠지만 부쩍 사소한 기억이 오래도록 뇌리에 각인되어 문득문득 떠오르고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황당하고 완성도 떨어지는 영화임에도 스칼렛 요한슨과 최민식 때문에 보게 된 영화 '루시'(난 '제5원소' 이후로 뤽 베송 영화를 보지 않았다)에서는 뇌의 활용도가 높아질수록 인간의 감정을 잃어가는 주인공을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가 청소년 관람불가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나오는 러브신(과도한 폭력성 때문에 관람불가가 되었겠지만)이 있으니, 프랑스 경찰과 여주인공의 평범한 키스 장면이다. 아마도 스칼렛 요한슨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은 팬심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아닐까 싶지만, 아무튼 어떤 감정적 유대도 쌓이지 않은 경찰에게 루시가 키스를 하는 이유는 잃어가는 감수성을 놓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물론 경찰이 섹시가이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남자 배우라면 한국인 아니면 중국인(물론 모두 악역)으로 도배한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돕는 백인 경찰이 어떻게 섹시하지 않을 수 있을 손가?
여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여성호르몬 분비가 줄어 남성화되고 남자는 여성화된다고 하지만, 잃어가는 감성을 찾으려고 낯선 남자와 키스를 하는 것보다는 넘치는 감성을 주체하지 못하는 중년의 삶이 낫다고 하면 억지스러운 자기변명이 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넘쳐나는 감성이 부쩍 가을 날씨로 돌아선 9월 중순 내게 바쁜 일상의 아침을 엉뚱한 블로그질에 소비하게 만들었다. 고전 트로트(난 명곡이 즐비한 60~70년대의 트로트를 80년대 이후의 뽕짝 메들리와 구분하기 위해 고전 트로트라 부른다)의 명곡 '물새 우는 강 언덕'이 오늘 아침에 불현듯 떠오른 이유는 알지 못하겠지만, 이 노래가 나에게 투영되는 강렬한 이미지는 기억할 수 있다.
아마도 5~6년은 족히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이었으리라. 여느 때처럼 12시를 전후로 한 시각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출근의 압박에서 자유로운 불금(불수면 금요일)을 즐기며 거실을 뒹굴거리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마도 흘러간 드라마 단막극을 재방송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물론 이 드라마를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제목이나 줄거리는 떠오르지 않는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것은 시대적 배경이 기껏해야 60~70년대쯤이었고, 이야기의 화자는 일곱 살 남짓의 남자아이였다는 것 정도. 이 아이는 엄마와 단둘이 한옥집 단칸방에서 살았던 듯하고, 엄마는 밤에 일하는 직업(?)을 가진 것으로 짐작된다.
아이의 엄마가 밤일을 나가기 위해 화장을 하면서 매일 트는 노래가 있으니 바로 '물새 우는 강언덕'이다. 방바닥에 드러누워 화장하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와 오만가지 사연이 있을 듯싶은 젊고 예쁜 엄마는 날마다 이 노래를 들으며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화장을 한다. 이 한 컷의 이미지와 '물새 우는 강언덕'이란 노래는 그 뒤로 몇 차례 뜬금없이 떠오르고 진한 감정(?)을 선사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나는 여섯 살 때까지 한옥집에 살았기 때문에 널찍한 한옥집과 주인공이 사는 단칸방의 이미지가 남다르게 기억되었을 법하고, 가냘픈 선율의 노래와 함께 꽃단장으로 고단한 하루를 시작하는 엄마의 뒷모습이 묘하게 오버랩되어 뇌리에 각인되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느낀 이미지는 "처연함" 정도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날 이후로 '물새 우는 강언덕'은 '봄날은 간다'와 함께 내 고전 트로트 명곡 순위 1위를 다툰다. 공교롭게도 이 두곡 모두 백설희 선생님이 원곡을 불렀다. 내 감성과 이 분의 목소리 사이에 묘하게 교집합이 있는 것 같다. '물새 우는 강언덕'의 가사를 한번 되짚어 본다.
물새 우는 강 언덕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에
그대와 둘이서 부~르는 사랑노래
흘러가는 저 강~물 가는 것이 그 어데뇨.
조각배에 사랑 실고 행복 찾아 가자요.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에
그대와 둘이서 부르는 사랑~노래
흘러가는 저 강~물 가는 것이 그 어데뇨.
조각배에 사랑 실고 행복 찾아 가자요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에
그대와 둘이서 부르는 사랑노래
* 가사를 읽다가 떠올랐다. 이 노래가 나에게 주는 기억은 "가요무대"이고, "가요무대"는 22년 하고 9개월 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아낌없이 좋아하시던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본 드라마에서 화장을 하는 엄마는 늘 이 노래를 나지막이 흥얼거리듯 따라 부른다. 나의 아버지도 가요무대를 보시면서 늘 나지막이 따라 부르셨다. 아마도 한주의 고단한 삶을 풀어주는 유일한 휴식의 시간이셨을 것이다. 모든 사연 많은 과거를 가슴속에 묻고 묵묵히 아이를 위해 밤일을 나가려고 화장하는 엄마에게서, 불 꺼진 거실 소파에 몸을 묻고 TV에 시선이 고정되어 노래를 흥얼거리시던 내 아버지가 보였던 것이 아닐까? 나에게 이 노래는 '아버지'로 기억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