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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Sep 09. 2023

광토마를 응원합니다.

동일시라는 환상

아무 이유가 없었다. LG 트윈스 시절부터 이형종이라는 선수를 응원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언제나 그 선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2007년 서울고 야구팀의 전국대회 결승에서 무리한 역투 끝에 우승을 놓치고 마운드에서 우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였다. 이형종이라는 선수를 알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여리디 여린 고등학생이 혼자서 팀을 결승까지 이끌고는 혹사 끝에 마지막 한 이닝을 마무리하지 못해 상대 팀이 우승의 영광을 즐기는 순간에 홀로 마운드에서 무릎 꿇고 서럽게 우는 모습이 내게는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나도 힘들었던 시절이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그는 2006년 끔찍한 서해대교 추돌사고로 어머니를 여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울음에 더 동화되었는지도 모른다.


그해 말 그가 프로야구 신인선발에서 1순위로 지명되는 것을 보았고 내가 응원하던 팀의 유망주로 각광받는 것을 보면서 나 또한 흐뭇함과 즐거움에 들뜨기도 하였다. 그것도 잠시 부상으로 금방 은퇴의 길을 걸었던 그를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를 잊어갈 무렵 1군 무대에서 야수로 변신한 그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된 것은 2016년이었다. '야잘잘'이라 불리며 화끈한 타격과 몸을 사라지 않는 플레이로 LG 트윈스의 팀칼라에 너무나 어울렸던 그가 언젠가는 리그를 씹어먹을 만큼 엄청난 성적을 한 번은 내줄 거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스윙은 그 어떤 전설적인 타자의 그것보다 호쾌하고 시원했다. 나의 믿음은 가히 종교적 신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매년 부상에 시달렸고 그에 따른 공백으로 외야진이 탄탄하기로 유명한 팀 내에서 주전경쟁의 희생양이 되고 있었다. 나는 그를 꾸준히 선발로 올리지 않는 감독들을 쉴 새 없이 비난했지만 그들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잇따르는 불운은 화려한 부활을 보고 싶은 내게 희망고문 같은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다. 그의 선수경력과 내 삶을 동일시하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서울고 시절 ‘눈물의 에이스’로 불린 그에게 “광토마”라는 다소 생소한 별명이 주어진 유래는 이랬다. LG 트윈스가 낳은 위대한 프랜차이즈 스타 “이병규” 선수의 별명인 적토마를 계승하면서 그와의 차별화를 위해 선택한 이름이 미친 적토마라는 뜻의 “광토마”였다는 것이다. 그 다운 작명이라고 생각했지만 미쳤다는 말이 갖는 부정적 의미를 떠올린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으리라. 별명의 저주 때문일까? 그에게는 불운이라는 그림자가 늘 따라다녔고 어느덧 고참소리를 들을 만큼 선수생활의 종반전에 이르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작년 말 퓨처스 FA의 마지막 수혜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선발이 보장되는 키움 히어로즈로 이적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가 연봉과 주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준우승을 할 정도로 탄탄한 팀에서 주전선발로 화려하게 날개를 펼 그의 모습에 나는 잔뜩 희망에 부풀었다. 아이의 우울증 투병으로 즐거울 것이 하나도 없던 내게 유일하게 반가운 소식이었기에 더 그랬다.


프로야구의 팬이라면 알겠지만 2023년의 키움 히어로즈는 최악이다. 주전들이 줄줄이 부상에 부진에 시달렸고 급기야 리그 중반에 에이스급 국내선발을 선두 팀에 트레이드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사실상 리그를 포기하고 팀 리빌딩에 나선 것이다. 그 부진의 흐름에 이형종 선수가 속해 있다. 그에게 에이징 커브가 왔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 만큼의 성적이다. 2023년에 거는 나의 유일한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은 이 시점에 나는 또 동일시라는 망령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 20 경기도 남지 않은 리그 후반에 그만큼은 반등해 주리라는 기대, 그리고 내년에 화려하게 부활해 주길 바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의식적으로 주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지리멸렬한 나의 올해와 그 연장선일 것 같은 내년에 대한 희망을 그의 부활을 통해서 현실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그의 선수생활을 우울한 내 삶에 대입해 버린 이유는 없다. 그저 내가 좋아하고 응원했던 선수의 현재와 나의 현실이 교차했고 타석에서 언제나 우울한 그의 표정에서 내 모습이 투영되었다. 그래서 그가 부활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응원한다. 내 아이의 회복이 간절한 만큼 말이다.


* Image from 키움 히어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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