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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May 31. 2023

남부럽지 않은 vs. 남부끄럽지 않은

(2014.04.16)

* 남부럽다 : 남의 좋은 점이나 우월한 점이 부럽다.

** 남부끄럽다 : 창피하여 남을 대하기 부끄럽다.

- 출처: 네이버 어학사전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 혹은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라는 표현을 흔히 쓴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우린 '남부럽지 않아야 하는' 삶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처지와 환경에 만족한다는 긍정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굳이 '타인의 처한 상황'을 비교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자신의 행복감을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한 것이고, 그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보편적인 타인의 삶과 비교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만족의 주체적인 기준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고 불감증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남부러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진정코 고유의 자기 세계를 갖고 그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이에게 남부럽지 않은 삶이란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데 부럽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가끔 자신의 삶이 '남부럽지 않다'라고 강조하는 사람들을 본다. 대개 그런 이들은 이미 깊이 남을 의식하고 있고, 끊임없이 남부러운 상황에 노출되고 있다. 다만, 자신의 지위, 재력, 집안, 학벌 등등의 세속적인 기준이 보편적인 다수의 평균보다는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러 강조할 따름이다. 그걸 의식하고 있는 스스로가 불행함을 깨닫지 못한다.

 

한편, '남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혹은 '남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다.'라는 표현은 세상을 사는 중요한 윤리적 기준이 된다. 양심에 손을 얹고 정당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는 내가 취할 행동이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것이냐를 고려해 보면 된다. 남의 눈에 부끄러운 일이라면 정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객관성을 확보하는 기준은 '남에게 부끄러운 일인가'이지 '남을 부러워할 형편인가'가 아니다. 간혹 '남부럽다'와 '남부끄럽다'를 오용하는 경우가 있다. '잘 사십니까?' 하고 물었는데 '남부끄럽지는 않게 살고 있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잘 살고 못 살고가 당당하거나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물론 이 경우에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라는 대답도 썩 바람직하진 않다. 이미 남을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낸 꼴이니 말이다.

 

잘 살고 있음의 판단 기준은 남들 보다 나은가 못한가도 아니고 남들 보기 당당한가 부끄러운가도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로 결정되는 것이다. 제아무리 화려하고 폼 나는 지위를 누린다 해도 당신의 마음이 편치 않고 일이 고달프다면 못 사는 것이다. 남부러워하지도 말 것이며, 그저 남들 보기 부끄러운 짓만 삼가고 살아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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