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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May 16. 2023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

휴직 44일 차의 소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운전면허를 취득하지 않았다고 한다. 면허증이 있으면 차를 갖고 싶어지고 차를 소유하면 타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 조선 팔도를 유람하는데 운전을 하게 되면 놓치는 풍경이 많아 직업윤리상 애당초 운전을 포기했다는 얘기였다. 그의 책을 즐겨 읽던 젊은 시절의 기억이라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 순수한 열정에 공감했다. 문화권력이니 뭐니 하면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기 전 기억하는 그의 모습이다.


어쨌든 휴직 44일 차를 맞는 오늘, 서울교대 교정에 앉아 하릴없이 아이를 기다리면서 문득 그의 이야기가 떠오른 이유는 이렇다. 오전 10시에 아이를 위센터에 들여보내고 수업이 끝나는 오후 3시까지 나에겐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점심을 거르는 아이를 위해 12시에 잠시 센터에 들러야 했으니 집에 다녀오기도 애매하여 차를 공영주차장에 세우고는 서초동 인근을 어슬렁거렸다. 온전한 자유시간이라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한가하다는 면에서는 근자에 경험하지 못한 자유와 무료함을 만끽하고 있다.


그래서 유홍준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운전을 하면 볼 수 없는 풍경이 있듯이 일상에 매몰되어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자꾸 보였으니 말이다. 오전엔 주차장 근처 스터디카페에 갔다. 말로만 듣던 스터디카페에 처음 갔지만 은근히 긴장을 했던 게 오십이 넘은 아저씨가 배낭에 노트북 PC를 넣고 카페에 온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비칠지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따위를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울 만큼 오전의 카페는 적막했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곳이라 입구의 키오스크에서 가장 짧은 2시간을 결제하고 들어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시간에 누가 있었더라도 사실 내 행색 따위는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었을게 뻔했다. 난 괜한 생각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유난스러운 습관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그곳에서 여유롭게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준비하고 있는 브런치북의 글을 써 내려갔다. 12시에 아이를 만나 근처 카페에서 음료 한잔을 사주고 1시간 반을 죽치고 있었다. 적막했던 스터디카페와 달리 점심시간의 도심카페는 요란했다. 카페의 음악소리가 유난히 컸는데 그 소리를 뚫고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어팟을 끼워도 소용이 없었다. 왜 애들이 노이즈캔슬링 기능에 목매는지 알게 되었다.


더는 버틸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나와 인근 복권방에 들렀다. 한가한 서초동의 로또명당(1등 당첨자를 두 번이나 배출한)에는 근처 건설현장에서 온 노동자로 보이는 한분과 정장재킷을 걸친 중년의 남성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신중하게 마킹을 하고 꽤나 다량의 복권을 다양하게 구매하고 있었다. 서초동에 이런 규모의 복권판매점이 있는 것도 고액의 복권을 구매하는 사람을 보는 것도 나에겐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한주에 만원 이상을 복권구매에 투자한 기억이 없다. 그것도 매번 온라인에서 만원의 행복(?)을 즐기던 내겐 새로운 풍경이었다.


아직도 한 시간 가까이 남은 시간을 메꾸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서울교대의 교정이다. 이상기온으로 30도에 육박하는 오월이지만 그늘 밑 벤치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 에어컨을 튼 카페보다 백배는 훌륭하다. 이곳이야 말로 다양한 군상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산책을 하시는 노인분들이 가장 많았지만 의외로 학생이나 학교관계자가 아닌 젊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부설초등학교의 체육수업이 한창이고 내 옆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저씨 둘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곳에 올 일이 앞으로도 많을 것 같아 얼마후면 이들의 정체를 대강 꾀는 날이 오리라 생각하며 서둘러 차를 빼러 나오는 지금,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헤아려 보면 앞으로 시간 때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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