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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Sep 12. 2023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마법

뒤늦게 발견한 일본의 영화작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원더풀 라이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브로커'에 이어 벌써 네 번째 감상하게 되었다. '걸어도 걸어도'라는 작품은 영화정보 프로그램을 통해 이미 대강의 줄거리와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내가 본 몇 편 안 되는 그의 작품에서는 늘 변하지 않는 스타일이 느껴졌고 요절한 지 10년이 넘은 큰아들의 기일에 모인 가족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되는 전개를 기대하며 감상하게 되었다.


아이가 감기몸살로 하루 일정 전체를 취소하게 되어 갑자기 무료해진 낮시간을 메우기 위한 선택으로는 최적이었다. 가족영화였기 때문에 더 그랬다. 답답한 마음에 조금의 온기가 필요했다. 이 영화는 내가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중 최고였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면서 서툰 아버지로 고군분투하는 내 모습이 투영되었는데,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었다.


영화제목 “걸어도 걸어도”는 아버지가 내연녀의 집에서 흥얼거린 대중가요 가사인 동시에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평생 곱씹으며 들었던 것이기도 했다. 장남의 부재라는 공통의 슬픔을 안고 사는 한 가족의 삶을 들여다보는 영화의 제목으로는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 영화의 제목을 들었을 때 떠올랐던 첫 이미지는 나의 애창곡 “이별의 종착역”의 첫 소절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길, 나그네 길~“


가도 가도, 걸어도 걸어도 우리의 삶은 쉽게 나아지지 않고 운명처럼 짊어지게 된 고뇌의 삶에는 딱히 희망이 없다. 그 슬픔과 분노와 서러움을 안고 우리는 묵묵히 걷는다. 이런 이미지였다. 그리고 그런 의미로도 충분히 해석될 여지가 있는 영화였다. 주인공 부부가 아버지 집에 찾아가며 걷는 길은 평탄하지 않다. 주인공 부부를 배웅하고 돌아가는 노부부의 길도 같다. 게다가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에 의지하고 걷는다. 큰아들의 산소에 다녀오는 길에 어머니가 앞서가는 둘째 아들의 손을 의지하며 힘겹게 따라가는 모습도 애잔하다.


따라서 이 영화의 제목은 사실상 해체된(신뢰와 애정이 붕괴된) 부부를 상징하면서 한편으로 그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가족의 모습도 담고 있다. 영화 속에 단 한번 흐르는 노래(블루라이트 요코하마)의 가사를 다시 찾아보니 이랬다.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와 같이

나는 흔들려서 당신의 품 속으로“


사랑하는 남녀관계를 노래한 지극히 통속적인 가사에서 나는 다른 의미를 발견했다. 작은 배 안에서 걷는 것과 같이 늘 제자리인 삶의 종착지는 언제나 “당신의 품”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품이 어찌 연인 사이에만 있겠는가? 작가가 생각하는 가족이 이런 게 아닐까? 영화는 보는 내내 불협화음을 애써 숨기는 가족 간의 불편한 대화로 점철되어 있지만 나는 내내 이 영화가 따뜻했다.


가족의 실체를 낱낱이 까발렸지만 언제나 답은 가족이었다. 나는 그 통찰력에 탄복하고 그 따스한 시선에 감동하며 우울증 투병 1년을 맞는 아들의 점심상을 차리기 위해 일어났다.


* Image from “걸어도 걸어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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