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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Jun 03. 2024

잘 날지 못하는 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요즘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의 어릴 적에는 무시로 듣는 말이 있었으니, '생기다 만 자식', '사람 구실이나 할까 걱정되는 자식'이라는 말이었다. 주로 부모들이 못난(?) 자신의 자녀를 두고 농담처럼 주고받는 말이었다. 나는 그런 자식이었다. 결혼하시고 10여 년 동안 아이 넷을 낳은 후(중간에 한 아이는 세 살쯤에 의료사고로 사망했다) 불임수술을 준비하다가 덜컥 생겨난 자식이 바로 나였다.


나는 자라는 내내, 아니 성인이 되어서까지 안 낳으려다 낳은 자식, 생기다 만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늦둥이는 칠삭둥이와 동의어였다. 생식기능이 떨어져 갈 나이에 운 좋게 생겨난 자식은 언제나 이런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나는 서너 살 무렵에 신장염이라는 큰 병을 앓고 나서 만 열 살이 될 때까지 체중이 20킬로그램이 되지 못했다. 이런 실정이었으니 내 어머니는 당신의 말에 더 힘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당신의 첫딸처럼 허무하게 세상을 뜰지 모른다고 생각하셨을 거다.


어릴 적부터 이런 말을 들었던 탓인지 나는 언제나 사람 구실이 무엇인가에 생각이 많았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이고, 제 구실 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걸까? 답은 뻔했다. 우월한 능력을 보여주면 되었다. 공부를 잘해 소위 명문대학을 나온 뒤 전문직이나 폼나는 대기업 명함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나를 놀린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이런 통쾌한 반전이 허락되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나는 평생 제 구실 못하는 인간이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았고, 이제야 겨우 그런 시선에서 조금 자유로운 신세가 되었다.  


농경과 유목의 정착생활이 시작된 이래 인류는 노동력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손은 재산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니 제 몫의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자녀는 제 구실 못하는 존재로 낙인찍혔다. 구약성서를 읽다 보면 가끔 자녀와 낙타(약대)가 동급으로 취급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사실 낙타가 월등한 지위였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랜 농경의 역사를 간직한 이 나라에서도 자녀는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남아선호 역시 노동력 측면에서는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어머니가 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 나를 그렇게 취급하신 건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어미가 새끼를 죽이는 일이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시원찮게 태어나서 제 구실을 못할 것 같은 놈은 죽였다. 그래야 부족한 젖을 다른 새끼에게 나눠 먹일 수 있었고 건강한 아이들을 더 건장하게 키울 수 있었다. 제 구실 못할 것 같이 나약해 빠진 새끼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 법도 하지만 자연진화의 법칙은 이들에게서 모성마저 거두어 갔는지 모른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계에선 당연했을 것이다. 날지 못하는 새는 둥지 밖으로 내쳐졌다. 그 둥지 밖에서 날아오르면 사는 것이고 추락하면 먹잇감이 되었다.


이때 어미의 마음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새끼를 거두지 못하는 어미가 억장이 무너지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새끼를 잃은 어미의 울음을 들어보면 인간의 세계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날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렇게 날아오르지 못하면 이 아이는 세상을 살아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제 구실을 하는 어른으로 키워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 아이는 날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잘 날지 못할 뿐이란 걸 알았다. 아니면 좀 다르게 날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내가 이 아이의 날개를 가늠할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자꾸 내 멋대로 짐작하곤 했다.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 특히 떼 지어 날아다니는 철새들은 무리에서 낙오하면 살아갈 수 없다. 먹잇감과 은신처를 구하지 못하며 다른 무리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지 못한다. 결국 낙오는 사망선고와 다르지 않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무리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제도권에서의 생존을 기러기의 무리생활과 동일시하곤 했다. 나의 아이는 잘 날지 못하지만 기러기가 아니었다. 또래집단에서 잠시 벗어나있을 뿐 그 어디에서도 낙오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이가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때 나는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못했다.


"너는 새가 아니야, 너는 사람이야... 그래서 잘 날지 못해도 되고 굳이 날지 않아도 돼..."


내 아이가 겨울마다 따뜻한 남쪽나라로 이동해야 하는 기러기가 아닌데 나는 너무 많은 착각 속에 빠져 살았다. 그게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아이의 상태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바보 같은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내 아이가 비상하는 그날을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인간은 제 구실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제 구실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지 않은가?


일 년 만에 두 번째 학업중단숙려제에 돌입한 나의 아이가 5주 차를 맞았다. 몇 주 전부터 재미를 붙인 가죽공방에 정규클래스를 등록하였고, 학교를 통해 소개받은 가죽공예 장인의 회사에서 위탁수업을 받을 기회도 얻었다. 이 아이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알 수 없지만 지금 할 일이 생긴 것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약기운에 절어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아이가 고작 한 해만에 이렇게 달라진 것이다.


나는 아이를 응원하고 먹이(?)를 줄 것이다. 이 아이가 날아오르든 땅에 떨어진 모이를 주워 먹든 관계없이 말이다.


* Image from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미야자키하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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