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가치기준은 이토록 다양해질 수 있다.
용감한 형제도 아니고 난데없이 용감한 호랑이가 떠오른 이유는 10여 년 전 인연이 닿았던 한 사람의 이름과 연관이 있었다. 그분은 첫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본인의 이름을 기억하기 쉽게 "나는야, 용감한 호랑이"라고 말씀하셨다. 표현 자체가 워낙에 옛날 방식이었지만 그분의 이름 석자를 품고 있는 그 조합 덕분에 누구든 그를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분은 그 구닥다리 표현만큼이나 구수하고 순수하였다.
나보다 여섯 살 남짓 나이가 많았지만 그분은 누구를 대하든 언제나 태도가 같았다. 상대를 항상 존중하였고 말투가 늘 겸손하였다. 당시 나는 한 공공기관의 팀장을 맡고 있어서 본의 아니게 그분의 채용면접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분은 유수의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굴지의 대기업에서 10년간 근무한 뒤 국가대표급 벤처기업에서 다시 1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수석부장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임원 승진을 준비해야 할 그가 공공기관의 채용문을 두드린 이유는 이랬다. 2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기는 관리직보다는 실무자가 더 적성에 맞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기업 대상 전문컨설팅사업의 프로젝트 매니저(PM)를 뽑는 채용에 응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공공기관이었어도 그분들은 모두 신분이 불안정한 계약직 형태로 채용되었기에 나는 도대체 그분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당시에 12명의 PM을 채용했는데 그중 6명은 모두 대기업의 부장급이었고 나머지 6명은 전문자격증을 소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분을 제외한 대기업 출신들은 모두 은퇴의 갈림길에서 공공기관을 선택한 것이었고 전문자격을 보유한 이들은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발굴하기 위해 참여하고 있었다. 모두들 이곳에 온 이유가 명확하였지만 용감한 호랑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그분이 회사 내에서 어떤 사건사고에 휘말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조금 품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그를 의심한 나를 부끄러워해야 했다. 그분은 정말 실무를 하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 맞았다. 그분이 몸담았던 벤처기업은 워낙 유명한 창업주 회장님이 계셔서 정부주관 행사에 종종 얼굴을 뵐 수 있었는데 그 회장님은 행사에서 우연히 마주친 용감한 호랑이에게 깊은 애정과 아쉬움을 표현하셨다.
용감한 호랑이 덕분에 새롭게 론칭한 정부사업은 순항할 수 있었다. 조직사회에서 흔히 하는 말로 '선수'와 '프로'가 있다. 직급에도 없는 이 호칭은 일 잘하는 직원에 대한 일종의 애칭 같은 것이다. 이름 뒤에 '선수'가 붙으면 일을 운동선수처럼 잘한다는 의미고 '프로'가 붙으면 아마추어 선수가 아니라 프로급이라는 뜻이다. 내가 담당했던 정부사업에 참여하는 12명의 PM 중에서 '프로'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은 용감한 호랑이뿐이었다.
다른 분들도 능력과 스펙이 출중하였지만 용감한 호랑이는 완성도 면에서 '결'이 다른 결과물을 보여주곤 했다. 즉 뛰어난 성과에 머무르지 않고 무언가 감동을 주는 포인트가 있었다. 그분의 성과발표회는 늘 기립박수가 쏟아지곤 했다. 60억 원으로 시작한 그 사업은 15년이 흐른 지금 수백억 원 규모로 성장하였고 그만큼 PM의 수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런데 용감한 호랑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분과 같이 PM이 되었던 동기들 중에는 두 분이나 본부장(임원급)으로 승진하고 은퇴를 하였지만 용감한 호랑이는 여전히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업무에만 충실한 것 같다. 나는 그분을 만난 지 2년 후에 그곳을 떠났기 때문에 그분을 못 본 지 1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어 오늘 문득 그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야, 용감한 호랑이...
내 삶의 이정표를 제시해 준 분이었다. 당시 나이 어린 팀장이었던 나에게도 그분은 언제나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가 그렇게 굽힐 수 있었던 이유는 그와 내가 다른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현장의 전문가였고 나는 정부사업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실무자였다. 나 역시 지금도 실무자로서 내 업무의 고유성과 전문성을 무기로 버티고 있다. 누군가의 눈에는 나이 어린 상급자를 모시는 부하직원쯤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야, 용감한 호랑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