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 1일로부터
만 28세를 갓 넘긴 시기에 나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취업을 하였다. IMF 구제금융 시기에 취업난이 심각하긴 했지만 나는 어떤 면에서 자발적인 백수였기 때문에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한동안 감수해야 했다. 당시에 백수가 얼마나 유행이었으면 대학로 연극공연장에서 한 손에 흰 장갑을 끼고 오는 이들을 백수로 간주하여 무료로 입장시켜 주는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나는 거기에 동참할 만큼 배짱이 없었다. 아니 그들과 동류로 취급되는 게 못마땅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 졸업 후 정확히 2년 반 만에(중간에 대학원에 진학하긴 했지만) 나는 비로소 제도권에 합류하였고 경제적으로 독립하였다. 그리고 24년이 흘렀다. 직장경력 5년이 되었을 때부터 나는 자유로운 백수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5년도 이렇게 끔찍한데 10년, 20년 이상 직장생활을 하는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견디고 사는 걸까 궁금해했다. 그런데 이젠 알 것 같다. 아무리 끔찍해도 버틸 수 있는 건 버텨야 한다는 당위와 버티고 있었던 관성이 내 마음과 몸을 지배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두 아이를 키우면서 그 아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건 생계를 위해 원하지 않는 직업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모든 직장인이 입에 달고 사는 표현이 있다. 바로 '지긋지긋'이라는 말이다. 성인이 되면 대부분 인생의 절반, 아니 2/3 이상을 생업에 종사하게 된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시간 내내 '지긋지긋'해서야 되겠는가? 나의 부모님 세대에는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직장이 최고의 가치였다. 그걸 탓할 순 없다. 그러나 다음세대인 나의 아이들조차 그 가치관에 가둬야 할까?
좋은 대학을 나오고 번듯한 직장이나 직업을 갖는 일이 어디 가서 말하기엔 좋다. 우리 아이는 어디에 다녀, 혹은 무슨 일을 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소위 명문대학이거나 굴지의 대기업이거나 전문직일 때 당당해진다. 군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에겐가 자녀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잘 없다. 아니 그런 자리가 오더라도 말하지 않는 게 미덕이다. 혹여 그들이 저 집 애는 내세울 게 없어서 말을 아끼는 거라고 생각한들 어떤가? 내 아이의 삶이 충만해지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어떤 일을 하건 간에 조직이라는, 직장이라는 테두리에 갇히면 숨이 조여 오는 때가 온다. 제아무리 승승장구한다고 한들 어떤 직장이든지 필요에 의해서 사람을 쓴다. 직장은 법인은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당연히 피도 눈물도 없다. 그 직장에 다니는 인간적인 상사에게 피와 눈물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나의 운명을 행여 존재할지 모르는 인간적인 상사에게 맡기는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가? 따라서 직장에 다니면서 피와 눈물을 구걸해서는 안된다. 직장과 나는 철저하게 계약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생을 그런 곳에 갇혀사는 게 어찌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신이 조직이나 사회에서 주류일 때 자신과 그것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떤 조직도 구성원과 동일시될 순 없다. 그건 생겨먹길 그런 것이다. 탓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내 아이들이 직장에 조직에 묶이지 않고 자신의 업으로 경쟁력을 갖는 일을 만나길 바랐다. 물론 본인이 좋아하는 일에서 말이다. 무용을 전공하는 딸아이와 가죽공예를 배우고 있는 아들 녀석은 그런 내 바람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좀처럼 시도하기 어려운 길을 아이들이 선택하였고 나는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아이들의 앞날은 또 그들의 몫이지만 말이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계기를 만나 놀라운 반전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다만 그것은 예측할 수 없으며 의도해서도 안된다. 내 지나온 24년도 그러하였다. 일요일 아침 일찍 제주도여행을 떠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공항으로 배웅하고 잠시 직장에 들러 밀린 일을 정리한 뒤 집에 돌아와 한 주간 쌓인 재활용 분리수거를 완료하고 점심을 먹으려 할 때 자동차 뒷바퀴에 펑크가 난 사실을 알았다. 서둘러 영업 중인 타이어가게를 수소문하여 타이어를 교체하고 나서야 늦은 첫끼를 먹을 수 있었는데, 비로소 내가 25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니탕수육을 곁들인 짜장면에 고량주 한잔으로 24년간의 지긋지긋한 내 삶을 위로한 뒤 이 글을 쓴다. 40년 된 올드카의 펑크 난 뒷바퀴를 보니 내 모습이었다. 심지어 이 녀석과 나는 띠동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