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남해 독일마을

베를린성에서 2박

by 낙산우공

아이의 고등학교 졸업을 기념하며 남해 독일마을에 다시 왔다. 2023년 4월, 거제 한달살이 중에 하루 들렀다가 아이를 매료시켰던 이 마을을 작년 5월에 다시 찾았으니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당일치기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무려 3일째 머물고 있다.


숙소로 예약한 베를린성은 독일마을을 창시했다는 전직 교수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2일 차에 조식을 즐긴 후 나가려다가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기나긴 독일 이야기에 조금 당황했지만 친절하고 진솔한 분이셨다. 50년 전 유학생 신분으로 20년을 머무르셨다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차고 넘치실만하였다.


독일마을이 조성된 지 20년이 흘러 이곳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 같았다. 독일에 장기체류하던 한국인들의 귀국 프로그램으로 기획되었던 마을은 이제 처음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고 관광지로서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은 듯했다.


독일이라는 나라를 동경하던 내 아이에게는 아직도 선물 같은 곳이었지만 독일 현지 맥주를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버텨내긴 어려워 보였다. 아직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하는 아이는 10월의 옥토버페스트를 보러 다시 오자고 하였다. 살짝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겨울의 마을 분위기가 못내 아쉬웠던 탓이리라.


아무튼 우리 아이는 3년째 접어드는 우울증 투병기간 동안 무사히(?) 고등학교를 마쳤다. 단지 마치는 것에 의미를 두긴 했지만 과연 졸업장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의문이 드는 일이긴 했다. 아이와 나는 2년 내내 함께 등하교를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모든 마침표엔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아이는 작년 봄부터 시작한 가죽공예에 흥미를 붙여 꾸준히 공방에 다니고 있다. 여러 개의 가죽지갑과 한 개의 휴대용 백을 완성하더니 이젠 멀쩡한 브리프케이스를 두 개나 만들어냈다. 대견하고 장한 마음이야 가득하지만 여전히 관계와 일상을 회복하기엔 갈 길이 멀다.


그런 아이가 어느새 성인이 되었다. 걱정과 근심을 늘어놓으면 끝이 없다. 어제 저녁엔 피곤이 겹쳤는지 집에 있는 아내에게 장문의 하소연을 보내고 말았지만 새해 벽두부터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뜬다. 세상의 모든 일을 내 의지로 통제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아이를 보면 힘겹다.


그 이유를 엊그제 밤에 감상한 영화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독일감독이 만든 일본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그야말로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탄탄하게(?) 살아가는 도쿄의 공중화장실 청소부 이야기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화장실 청소에 매진하는 초로의 주인공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에 항상 진심이다. 단칸방에 살며 낡은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올드팝을 듣고 매주 중고책방의 백 엔짜리 책을 사서 읽는 주인공의 삶이 나에게는 그 어떤 화려한 삶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잠시 들른 주인공의 어린 조카가 했던 말이 이 영화의 메시지인 것 같다. 잘 나가는(?) 집안과 담을 쌓고 고집스럽게 청소부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에 대해 조카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빠는 우리와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리고…


이 이야기에 주인공은 이렇게 답한다. 세상에는 여러 개의 세계가 있는데 그것들은 사실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나는 주인공의 이 놀라운 통찰에 감동하고 말았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산다. 그것들이 하나의 시공간에 있다고 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이다.


나는 과연 내 세계를 잘 구축하고 사는가? 그런 면에서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보다 나은 이가 거의 없겠다고 생각했다. 낡은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몇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음향기기의 그것보다 뛰어나 보이는 것은 주인공이 구축한 세계가 그만큼 탄탄하기 때문이었다.


3년도 쓰지 않은 70여만 원짜리 에어팟맥스를 백만 원 가까이하는 독일산 헤드셋으로 바꾸고 싶어 날마다 노래를 부르는 내 아이의 세계가 불안해 보이는 이유가 단지 내 주머니 사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을 진심으로 동경해 마지않는다.


매일매일 혼자만의 시를 쓰며 살아가는 미국 패터슨시의 버스운전기사 이야기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과 매일매일 올드팝을 듣고 책을 읽는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 이야기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는 완벽하게 닮아있었다.


7년 전 패터슨을 보고 내 삶을 돌아봤는데 엊그제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는 내 아들의 삶이 떠올랐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우리의 퍼펙트 데이즈는 언제쯤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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