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쁠 땐 일만 보이고 한가할 땐 관계가 보인다

인생은 허무와 고통 사이

by 낙산우공

한 주 내내 독감에 걸려 헤매다가 주말에 쉬면서 조금 추스르고 출근을 했던 지난 월요일부터 나는 심하게 가라앉아있다. 날씨나 환경에 따라 우울감이 높은 날이 있긴 했지만 이틀 이상 지속된 경험은 처음이라 낯설고 불편하다. 어떻게든 이 상태를 설명해 내지 않으면 이런 기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기에 불안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목요일, 나는 무려 4일째 가라앉아있다.


몇 년 전 우울증 검사에서 나는 타고난 우울감이 깔려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물론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둘째 아이의 지독한 우울증 투병을 지켜보면서 나의 우울증이 악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민함과는 담을 쌓았던 아내까지 우울증 치료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나만큼은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온갖 우울감을 가중시킬 상황이 발생했지만 나는 가끔씩 절망하고 좌절하는 대신 우울감에 신음하진 않았다.


인간의 몸은 결국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자주 그런 경험을 한다. 절박한 상황에서 몸까지 말을 듣지 않으면 도무지 답이 없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다치거나 아픈 경우에 우리는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곤 한다. 경기 중에 다리가 골절되었는데 인식하지 못하고 풀타임을 소화해 낸 축구선수의 이야기는 놀랍지만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골절로 다리가 두 동강이 나지 않은 이상 통증만 인식하지 못하면 뛰는 데 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일체유심조'라 하지 않는가? 우리는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몸을 지배할 수 있다. 기적 같은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 것을 그저 신의 은총으로 감복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당신의 타고난 기질 탓일 수도 있다. 물론 타고난 기질도 신의 은총이겠지만 말이다. 내 아내는 결정적일 때 늘 결정적으로 아팠다. 그 절묘한 타이밍에 나는 온몸의 힘이 빠지곤 했지만 그녀의 몸은 그랬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 내 몸이 이런 것일까? 지독한 삼재해를 겨우겨우 넘겼는데 말이다. 아이는 천신만고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가죽공예라는 자기만의 일을 찾아냈다. 선후관계는 모르지만 이제 아이는 자신의 삶을 복원할 용기를 얻었다. 나는 힘겹게 복직하여 아이를 돌보며 양립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일과 간병을 해내고야 말았다.


그렇게 무사(?)히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 첫날부터 아들과 남해여행을 다녀왔다. 아들의 우울증으로 휴직을 하고 한달살이를 갔던 남해였고, 복직 후에 다시 힘겨워하는 아들을 위해 휴가를 내고 다녀왔던 남해였다. 그런데 세 번째 남해여행을 마무리하자마자 아들과 나는 독감에 걸렸고 지금의 나는 그 후유증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은 우울해 보이는 아빠를 위해 저녁마다 기색을 살핀다. 평소 좋아하는 메뉴를 준비하고 엄마와 열심히 요리를 해 준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아침에도 끝없이 가라앉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남해여행에서 밤에 혼자 보았던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후유증이 이렇게 큰 걸까? 초로의 화장실 청소부의 단조롭고 아름다운 일상에서 나는 깊은 공감을 하였지만 한편으로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보았다. 주인공은 도쿄에 와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날마다 과거에 얽힌 꿈에서 괴로워하며, 잠시 들른 조카를 통해 다시 과거의 삶과 마주한 뒤 흔들린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주인공의 마지막 장면이 아른 거렸다.


나에게 휘몰아쳤던 삼재동안 나는 두발을 딛고 서 있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제 발에 힘을 주지 않아도 서 있는 것 따위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는데 대신에 나는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다. 그 끝없는 번아웃이 나를 헤어 나오기 힘든 우울감에 빠뜨린 것 같다.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관계에서 나는 우울감을 느끼고 있다.


여전히 홀로 서기가 서툰 아들, 그 아들을 돌볼 배려심이 부족한 아내, 그 가족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고민하는 딸, 자식들로부터 소외되었으나 여전히 자신만을 걱정하는 어머니, 잠시 한가로우나 또다시 일에 파묻힐 회사, 친절하고 다정한 듯 하지만 결국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걸 정당화하는 동료집단, 그 안에서 앞으로 또 상당기간을 살아내야 할 나...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 아버지는 생일 때마다 돌아가신 엄마가 그리워서 가라앉는 기분을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나도 그와 같은 나이가 되었는데 나의 우울은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Image from “Perfect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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