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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피로감

내가 의식했던 건 무엇일까?

by 낙산우공

아주 오랜만에 대학원 연구실 동문들과 지도교수님을 만났다. 교수님의 회갑을 축하하는 자리여서 빠지기 어렵기도 했고 개인적인 사정에 이런저런 핑계로 찾아뵙지 못한 게 두 해가 넘었기 때문에 더더욱 지나칠 수 없는 자리이기도 했다.


정년을 5년 남기신 교수님과 은퇴시기가 크게 다를 바 없는 나와 동기 녀석은 이제 예전처럼 교수님과의 대화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에서 주요 보직을 섭렵하신 교수님이 더 순박해 보일만큼 우리도 사회생활에 절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자리가 자리인지라 교수님 위주로 대화가 이어지도록 배려하려 노력했지만 나름 직장에서 한자리쯤 차지해 봤던 동기 녀석은 서슴없이 자리를 주도하려 했다. 본래 그런 눈치가 없는 편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교수님이 알 턱 없는 주제가 계속될 때 나는 그 말을 적당히 끊어주느라 애를 먹었다.


교수님은 권위적인 분이 아니라 겉으로 크게 개의치 않아 보이셨지만 자칫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학교에만 계신 교수님은 주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접하더라도 결국 학교 안에서의 범주를 넘기 어렵다. 그런 분 앞에서 어쭙잖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름 현장감 있게 떠드는 건 일종의 과시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교수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요즘 뉴스에 나오는 이런 사건은 사실 배경이 이런 것이고 내가 어떤 일에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이라는 따위의 말들이다. 이날의 참석자는 공교롭게도 모두 공공부문에 몸담고 있었고, 대부분이 학계에 있는 제자들이었다면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말들이 난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런 자리를 경계했다. 묘한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대화에 참여하다 보면 정작 자리의 주인공은 꿔다 놓은 보리자루가 되어 있는 격이었다. 항상 나서기를 좋아했던 동기 녀석이 오는 경우 내 신경은 언제나 곤두서곤 했다. 그리고 사실 이날은 나의 피해의식도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그 모임에서 교수님 다음으로 연배나 경력이 많았다. 그리고 현재의 직위도 그런 편이라 항상 교수님께서도 상대적으로 예우를 해 주시는 편이다. 그런 이유인지 동기 녀석은 늘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꺼내고 교수님이 모르는 인물의 이름을 들먹이며 대화를 주도하려 했다. 대부분의 후배들은 비슷한 기관에 몸담고 있어서 이 녀석의 이야기를 경청하곤 했다.


나는 언제나 이런 상황에서의 묘한 분위기가 싫었고 그래서 가급적 자리를 피했지만 부득이 참석을 하는 날이면 늘 후유증이 있었다. 그리고 50대가 넘은 뒤로 동기 녀석의 대화주제는 업무 외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강남의 부동산에서 8학군의 자녀교육까지 말이다. 수입이 좋은 아내를 둔 탓에 이 녀석은 고급 외제차를 타고 강남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그 아이가 올해 고3이 되었다고 한다.


말을 아끼는 듯했지만 동기 녀석의 아이는 제법 공부를 하는 축인 것 같았고 녀석은 그런 아이를 위해 서울 외곽에서 8학군에 진입한 무용담을 떠들기 시작했다. 내가 이 녀석을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느꼈다면 그건 아마도 이 지점에서였을 것이다.


우울증 투병으로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의 둘째 사정을 뻔히 아는 녀석은 오랜만에 나에게 상대적 우월감을 만끽하려는 듯했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지만 나는 그걸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교수님과의 자리에서는 함부로 아는 척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내가 이날만큼은 그래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버린 것 같다. 사회적 지위로는 이 녀석이 스스로 인정할 만큼 내가 모두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나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그래서 집에 오는 내내 마음이 더 무거웠다.


술자리에서의 대화는 그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날이 선 말은 그렇지 않겠지만 대부분 신변잡기에 그치기 때문에 누가 좀 과하게 떠들어봤자 시효가 길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음이 불편한 것은 내키지 않은 자리에 부득이 참석했는데 결국 가장 우려했던 일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휴직에 아이 간병으로 소식이 뜸했던 나를 그리워한다던 동문들은 결국 이 모임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내가 필요했을 뿐이고 내가 퇴직을 하면 안부전화 한 통 하지 않을 이들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석사동문들이 나를 보기 위해 이 날의 자리에 오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하기도 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동문이 아니라 그저 인맥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동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영향력이 없으며 설마 있더라도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걸 잘 안다. 내가 어제의 모임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자녀문제로 나름 힘든 시간을 보내고 3년 만에 모임에 나온 동기에게 한마디 위로와 걱정의 말도 없이 자식자랑에 여념이 없는, 이 가볍고 몰상식하면서 천연덕스런 그리고 속물적인 자본주의 사회에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준 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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