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이 넘어도 별 수 없다.

지천명이라고?

by 낙산우공

인간의 수명이 백세를 향하다 못해 이를 넘어서는 단계에 이르렀다. 아흔이 넘어도 칠순노인만큼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물론 단명하거나 돌연사하거나 치명적인 투병으로 그렇지 못한 이들도 그에 못지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인류의 평균수명이 늘어갈수록 스물이나 서른은 성숙한 나이 취급을 받지 못하는 면이 있다. 마흔이 결혼 적령기로 손색이 없는 시대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 만큼 오십, 쉰이라는 나이는 유난스레 강렬하게 다가오게 되었다. 법정 정년이 얼마나 늘어날지 모르겠지만 이미 생계형 정년은 법의 한계를 뛰어넘은 지 오래다. 그래도 쉰은 정년과 닿아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정적 소득이 보장되는 시기는 오십 대에 서서히 바닥을 드러낸다. 오십에 이르기 전에 이미 험한 세상으로 나서는 이들도 많다. 회사가 정글이면 밖은 지옥이라고 말했던 드라마 속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오십은 사회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모든 면에서 성숙이라는 단어에 부합하는 최적의 나이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오십 번째 생일이 지난 지도 세 해째 접어든 나는 아무것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미숙한 것일까? 세상의 시선이 편견인 걸까? 나는 이 나이에도 여전히 화가 날만한 일에 화가 나고 조급한 일에 조급해하며 부당한 일에 분노가 인다. 단지 그 표현을 최대한 자제할 뿐이지 그게 성숙의 결과는 아니다.


"오십에 읽는~ "으로 시작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대부분 오십에 접어든 이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의 결과다. 쌓아놓은 것(재산, 명예, 하물며 인품이라도...)이 없으니 무어라도 붙잡고 싶어지는 것이다. 곧 법정 정년이 다가오고 그전이라도 험악한 생업전선으로 내몰릴 수 있는데 혹은 당장이라도 다 때려치우고 싶어 지는데 말이다. 내 나이는 오십이란다. 이제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천명을 깨우칠 단계란다.


나는 지천명의 인간을 오십 대는커녕 육십 대, 칠십 대 그 어느 연령대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들의 여유와 자비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에 기인하는 것이지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자기 성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인류가 깨우친 심오한 철학과 사상을 섭렵하였다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지식은 구도자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십 대가 되면 주위의 시선으로부터 오는 압박을 느낀다. 아이들 앞에서도 짜증을 내서는 안 될 것 같고 매사에 여유롭고 너그러워져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난 전혀 그런 수준의 인품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목구멍은 포도청에 내 의지와 무관하게 온갖 시련에 휩쓸리게 된다. 가령 아이가 아프다거나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그러니 책이라도 찾아 읽게 되는 거 아닐까?


책을 읽으면 위안이 되는 부분이 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된다면 당신은 하늘이 내린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주역에 나오는 '성성존존 도의지문(成性存存 道義之門)'이라는 글귀가 나에게는 많은 위안이 되었다. 생겨먹은 대로 살라는 것이다. 다만 생겨먹은 것을 자신만의 고유한 품격으로 승화시키라는 것. 그것이 도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이다.(내가 이해한 수준으로는 그랬다.)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나의 생겨먹은 것에 품위를 갖추기가 지독하게 어렵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쉰이지만 여전히 좌충우돌한다. 다만 언젠가 품격을 갖추게 되기를 희망한다. 내 포도청(?)도 진정이 되기를 바란다. 그게 내가 원하는 시기에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피하지 않고 맞서다 보면 내 삶에도 혹은 죽음에도 평온의 단계가 올 날이 있으려니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나는 생겨먹은 대로 오늘을 산다.


조금 덜 화내고 조금 덜 조급해하고 조금 덜 분노하려고 노력하거나 그런 모습을 좀더 세련되게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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