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의 장난인가, 운명의 장난인가
아침부터 날이 흐렸다. 새벽녘에 한차례 비가 내려 어제의 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습한 날씨는 한결 더했다. 그렇다고 출근길 기분이 가라앉지는 않는다. 그런 정도의 이유로 우울감이 찾아온다면 치료를 받아야 할 수준이다. 3년째 우울증 투병 중인 내 아들은 계절과 날씨를 탄다. 그래서 환절기 특히 봄이 시작되는 시기에는 긴장하는 버릇이 생겼다. 비가 오는 날은 더하다.
그런 아들 걱정으로 오늘 아침의 우울감을 설명하긴 어렵다. 출근길에 분명 아이 생각을 한 것은 맞지만 오늘의 흐린 날씨에 아이가 또 가라앉을까 하는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윗가슴은 7시 무렵부터 먹먹해 오더니 한 시간이 훌쩍 넘은 지금껏 내려갈 줄을 모르고 그 증상이 조금씩 더 감상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무슨 조화일까?
한두 가지 이유로 설명되지는 않았다. 첫째는 어젯밤부터 이어지는 답답함이었다. 반복되는 일상과 과중해진 업무, 조금씩 나아지지만 여전히 미래가 불투명한 아들의 증상, 졸업을 앞둔 딸아이의 분투와 그럼에도 불확실한 진로 그리고 그 딸아이가 감행하는 여름일정(홀로 뉴욕에서 한 달 살기)과 거기에 잠시 합류하기로 한 아내(가끔 본인의 앞가림도 버거워 보이는)에 대한 걱정 등등 오랫동안 쌓여온 답답한 현실이 어제 아들과 아내가 장을 봐온 거한 저녁상과 반주의 끝무렵에 나를 짓눌렀다.
두 번째는 50대의 흔해빠진 갱년기 증상이다. 여성처럼 분명한 생리증상을 보이지 않지만 남자도 갱년기가 있다. 신체적인 변화도 있겠지만 호르몬 분비의 변화가 더 영향을 주는 건 분명하다. 출근길에 틀어놓은 음악이 하필이면 그런 감상을 자극하는 곡이었고 나는 갑자기 고통받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과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이 떠올랐다. 이런 의식의 흐름은 대개 인간의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다.
오늘 내가 들었던 곡은 가수 이적의 '거짓말'이었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무슨 이유인지 나는 아이를 버리고 간 부모가 떠오르고 남겨진 아이의 감정에 이입되어 버린다. 그리고 오래전 딸아이와 함께 보았던 드라마 '그해 우리는'이 떠올랐다. 극 중 주인공 남자는 공원에서 아빠에게 버림받고 양부모 손에서 자랐다. 나는 항상 이런 설정에 가득한 슬픔이 밀려온다. 전생에 같은 경험을 한 것일까? 아니면 호르몬의 장난일까?
그리고 역시나 마지막은 내 아이들에게로 이어졌을 것이다. 3년째 우울증 투병 중인 아들과 꿈을 향해 도전하는 딸아이 모두가 내겐 안쓰럽고 걱정스럽기만 했다. 30년 전 나는 이 아이들 못지않게 막막하고 두려운 미래에 압도당했는데 내 아이들이 왠지 나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는 처지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자식걱정 없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느냐마는 내 유별난 예민함은 언제나 이렇게 스스로를 학대하는데 일조한다.
최근에 들은 얘기 중에 가장 공감 갔던 것은 한국인의 '동조강박'에 관한 것이었다. 심리학 용어로 '동조'는 집단의 압력 하에 개인이 집단이 기대하는 바대로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우리는 집단의 다수가 추종하는 가치에 맹목적으로 몰입하는 동조강박 사회에 살고 있다. 소위 SKY 대학에 가야 하고, 서울 그중에서도 강남에 살아야 하고, 전문직이나 대기업에 다녀야 하고...
극소수만이 달성할 수 있는 목표에 온 국민이 몰두하고 있으니 헬조선이니, N포세대니 하는 말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90% 이상이 열패감에 시달리는 사회가 어떻게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언제나 그런 집단의 강요된 가치를 거부하고 살았다고 생각했던 내 삶도 대한민국의 '동조강박'에서 그리 멀리 와 있지는 않았다. 그 강박감이 내 자식걱정의 뿌리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전 9시가 되기 전에 이 글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불쑥불쑥 찾아오는 우울감에 시달리는 50대인 동시에 두 아이와 한 여자가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가장이기도 했다. 나는 게으름을 타고났지만 유난스러운 책임감도 타고났다. 이런 미스매치가 내게 우울감을 주고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불균형과 불협화음의 연속이다.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위태롭게 지키는 자, 그가 바로 경계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