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일기, -286일(2020. 7. 21)
피로감을 쉽게 느끼고 기억력의 저하, 우울증 증상이 자주 나타나며, 신체적으로는 근력이 저하되고 체지방이 증가하며 뼈가 약해지는 문제가 온다. 성 기능도 저하하며 발기부전, 성욕 저하증 등이 문제가 된다. 남성 갱년기의 원인은 뇌, 고환의 노화현상에 따른 남성호르몬의 감소와 과도한 음주, 흡연, 스트레스 등 환경적 요인 및 고혈압, 당뇨, 간질환 같은 신체적 요인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생활건강 - 남성 갱년기 (삼성서울병원 건강칼럼)
남자도 갱년기를 겪는다. 주로 50대 전후로 나타나며 60대에까지 지속되기도 한단다. 이제 오십의 문턱을 마악 오르려는 내게 나타나는 다양한 육체적 그리고 심리적 증상(?)을 꼭 갱년기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 연관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체력 저하로 오는 피로감은 가뜩이나 예민한 나를 더 신경질적으로 만들고 불쑥불쑥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게 하기도 한다.
항상 온화하고 사람 좋아 보이던 나의 아버지는 아주 가끔씩 화를 주체하지 못하여 사람 대신 집안 기물을 파손하시곤 하였다. 그 모습에 공포감을 느꼈던 내게 비슷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스케일에 차이가 있을 뿐 나도 애꿎은 휴대폰 따위를 박살 내어 본 경험이 있다.
이런 나의 행동이 특정인을 상대로 하지 않았을 뿐 매우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습관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대증치료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문제행동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그 근본적인 원인을 해소하지 않으면 치유할 수 없다. 그저 억지로 그것을 잠재우려는 노력은 결국 일시적인 효과 외에는 무엇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잠복기가 지나고 나면 증폭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든 과잉은 결핍에서 온다. 나의 모든 과민반응은 지독한 결핍에서 오고 있다. 그러나 내게는 그 결핍을 채워줄 수단이 부재하다. 40대 후반의 남성은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숙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의 아버지가 폭발하셨던 순간의 표정을 기억한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외로움이었고 서러움이었고 원망이었다. 나도 힘든데, 나도 정말 많은 것을 참고 사는데, 나도 지쳐 쓰러질 것 같은데,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둬도 버텨낼까 의심되는데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지? 나도 오늘 하루가 끔찍했는데 왜 이렇게 나를 들들 볶는 거지?
내 어머니는 모르셨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그분이 폭발하는 순간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분의 인내심이 임계치를 넘어서는 시점을 말이다. 그러나 내 어머니는 그걸 평생 알지 못하셨다. 그 순간만 참으면 되는데 꼭 그 트리거를 당겨야 직성이 풀리는 어머니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화를 내고 싶어서 화를 내는 이는 없다. 그 순간 갑자기 꿈틀거리던 온몸이 미친 듯이 발작하는 찰나가 모든 일을 그르치게 만드는 시작이 된다. 그 순간마다 나는 어머니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내가 범접할 수 없었던 그 입은 언제나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가곤 하였다. 차라리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내 아버지는 호남의 벽촌에서 농사를 지으시다가 1960년대 후반에 가족을 이끌고 무작정 상경한 당시로는 너무도 전형적인 세대다. 종로구 창신동 단칸방 살이에 노점상으로 시작하여 중산층이 되신 흔해빠진 세대다. 그들의 궁색한 삶이야 이미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욹어먹었던 소재이기에 굳이 글로 옮기고 싶진 않다. 다만, 그분들의 치열한 삶 속에서 최소한 교육 환경만큼은 보장받았던 내가 내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비슷한 증상을 보일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이것이 그저 유전적 요인이나 가정환경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물론 나의 삶은 단언컨대 내 아버지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풍요와 행복을 구가하고 있다. 난 안정적인 직장과 집과 가족, 경기 침체와 청년실업이 가장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혹자는 호강에 겨웠다고 할 만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독한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 그 결핍이 내게 우울감과 상실감과 신경증을 선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생업전선에서 홀로 고군분투하시던 내 아버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내가 겪고 있는 결핍이란 무엇일까?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가정불화? 불안한 미래? 이 모든 것이 내게 온전히 배제되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나는 비교적 이 일반적인 고민거리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따라서 뻔한 이유를 달기에는 내 삶은 지나치게 건강하다.
차라리 무기력증과 자아 상실감, 그로 인한 우울감이 나의 심리상태를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내 사회적 지위와 가정에서의 역할이 내게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나는 가급적 성실하게 그 요구에 충실하고자 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책임회피며, 따라서 나에게서 보이는 성실함은 타고난 품성이 아니라 책임감에서 오는 인위적인 현상에 가깝다. 난 타고나기를 게으르며 반복되는 일상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결국 이 기묘한 미스매치가 나의 상실감의 근본적인 원인이라 하겠다. 적어도 나의 진단에 따르면 말이다. 난 반복적인 일상과 성실하고 기계적인 삶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반면, 나의 사랑하는 이들이 내게 원하는 모습은 그 반대편에 있으며 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이 팍팍한 동거가 지속된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서 나의 책임은 갈수록 가중되었고 그 피로감이 누적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갱년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난 내가 의무적으로 혹은 도의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수많은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것이 나의 욕망이 가리키는 지점이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서 너무 오래 너무 멀리 달려왔으며 이제 내 삶은 온통 숙제만으로 가득 차 버렸다. 그래서 나는 숨이 막힌다. 나는 성실하지도 의욕적이지도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현실이 못 견딜 만큼 괴롭다.
나는 그저 쉬고 싶고, 내가 짊어진 책임에서 내려오고 싶다. 나를 압박해 오는 의무감에서 해방되고 싶다. 이 강박과 집착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냥 숨 쉬고 싶다. 그냥 바람을 맞고 싶다. 그냥 거닐고 싶다. 그냥 방랑하고 싶다.
그런데 나의 삶은 아이의 아침 등교 시간에 맞추어 일어나고, 아이를 내려주고 출근을 하며, 회사에서는 주어진 기일에 맞춰 해야 할 일을 하고, 아이의 학원 시간에 맞추어 퇴근을 하여 아이를 데려오며 하루를 마감한다. 주말에는 아이의 스케줄에 맞춰 움직이고 그 아이들의 하루 세 끼에 맞추어 식사를 하며, 틈틈이 남는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TV 채널을 돌리다 잠시 졸다 깬다. 나는 생업에 종사하며 그 수입(과 아내의 수입)으로 가족의 삶을 영위한다. 그리고 가족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무언가를 한다. 그렇게 하루가, 한주가, 한 달이, 한 해가 간다. 그러다 오십을 목전에 두었다.
이 삶이 10년 정도는 반복되어야 나는 많은 짐들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나, 이미 나의 체력은 바닥을 보이고 나의 인내심은 바닥을 쳤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울화는 내 한심한 일상에 대한 내 몸의 반응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한심하고 서글픈 이유는 이러한 나의 일상이 행복이란 단어로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서의 행복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반복적인 일상의 수혜자에게 돌아가야 맞다. 그들의 행복이 나에게도 동일한 기쁨으로 돌아오지만 그것으로 내 삶이 보상되지는 않는다.
내 일상의 어느 지점에서도 나는 없다. 나의 자아와 그 자아에 대한 배려는 없다. 나는 온전히 사라졌다. 나는 도구적 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깨어있다. 나의 쓰임에 만족하면서도 내 삶이 누군가의 쓰임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달갑지 않다. 나는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아는 끊임없이 나의 욕망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나의 결핍은 내 자아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모든 것의 결핍이다.
그래도 갱년기가 있어서 다행이다. 내 고통의 변명거리가 생겼고, 그 지질하기 그지없는 갱년기는 그 이름처럼 한도가 있기 때문이다. 유통기한이 있다는 말이다. 그 말을 믿으면서 나는 오늘을 버틴다. 견딘다. 살아낸다. 갱년기라서 괜찮은 건지, 갱년기지만 괜찮은 건지 모르지만 나에겐 핑계가 생겼다. 이건 내 탓이 아니야... 내 몸의 주기가 갱년기이기 때문이야. 그러니 갱년기만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터무니없는 기대감을 심어주어서 그래서 참 다행이다.
휴직을 감행하기 약 9개월 전 나의 심리상태였다. 내가 끔찍함을 인지하고도 9개월이나 더 버텼구나 생각하니 휴직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어려운 결정을 하기까지 나 또한 힘겨운 시간을 보냈고 그 기억과 마주하는 일도 불편하기만 하다. 나이 오십에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몇가지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