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일기, +114일(2021. 8. 24)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가 지났다. 밤에도 여전히 후텁지근하지만 창문을 열고 있으면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장마라는 낯선 단어가 뉴스에 등장하고 있지만 늦은 여름 끝 장마는 늘 있어왔다. 나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에는 9월이 시작하자마자 어마어마한 장마가 들이닥쳐 개학을 하고 일주일이 안돼 휴교령이 내렸다. 학교는 수재민들의 임시대피소로 쓰였고 집 앞 한강의 뚝방은 물이 찰랑찰랑 차올라 통행이 금지된 강변북로를 넘어 떠내려가는 세간살이를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걱정이 많으셨던 어머니는 나와 누나를 외가에 피난 보내기까지 하셨다. 흡사 영화 기생충의 수해현장과 다를 바 없었다. 아마도 봉준호 감독은 1984년 서울의 늦은 장마를 경험하지 않았던 것일까 추측해 본다. 뉴스에서는 매일 밤 팔당댐의 방류량과 인도교 수위를 보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서운 물난리가 사라진지는 꽤 되었다. 무섭게 몰아치는 장마는 해마다 거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공무원의 여름은 을지 포커스 렌즈 훈련과 함께 끝이 난다. 매년 8월 중순경에 실시하는 을지포커스는 군관 합동훈련이기 때문에 모든 공무원이 비상상황에 대응하는 훈련에 참여한다. 물론 기존의 업무가 있기 때문에 교대로 상황실에 차출되어 레몬색 민방위 점퍼를 입고 불시에 떨어지는 상황에 따라 매뉴얼대로 대처하는 일을 한다. 이를테면 A라는 국가보안시설이 적의 공격을 받아 시설이 파괴되고 다수의 사상자가 났다는 상황이 발생하면 해당 시설의 복구와 대체 시설의 지정, 사상자 수습을 위한 추가적인 조치 등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후속조치결과를 올리는 식이다. 구체적으로 이 훈련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설명할 이유는 없지만 그 연례행사가 전시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매우 일사불란하게 전개된다고는 볼 수 없다. 물론 그마저도 최근에는 축소 또는 생략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예비군 동원훈련을 다녀온 예비역 군인들은 대략 어떤 모습일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공무원의 여름휴가는 을지훈련과 함께 끝이 나는데 다소 형식적인 내용일 망정 전시상황에 준하여 비상소집훈련을 하고 각종 안보교육을 이수하기 때문에 나른해진 휴가 기분을 떨쳐 내기엔 그만이었다. 자, 이제 일을 해야지…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10개월 남짓한 휴직기간도 어느덧 반환점이 가시권에 들어오는 시기에 여름마저 끝나고 나니 나의 휴직도 곧 끝나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슬그머니 올라오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난 봄의 끄트머리에 휴직을 시작하여 봄의 시작과 함께 복직해야 한다. 결국 나에게 남은 계절은 짧은 가을과 조금 긴 겨울이다. 온몸이 움츠러드는 겨울이 지나면 난 파릇파릇한 봄내음을 맡아볼 새도 없이 업무에 복귀할 것이다. 그 일이 기존의 업무이던 새로운 부서의 업무이던 낯설고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일 것이니 엄습해오는 불안감이 유난스러운 것은 아니다. 차근차근 진행되는 휴직 계획들로 지나온 4개월이 허망하지는 않지만 두 아이의 입시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나는 여전히 바쁘고 또 힘겹다. 이제 두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나면 온전히 나의 시간이 돌아오겠지만 쫓기는 마음으로 4개월을 허비할지도 모른다. 보다 촘촘하게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조급함이 밀려온다. 앞으로 은퇴하기까지 내게 휴식이란 금기어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남은 6개월이 너무나 소중하고 절실해 온다. 그런데 그중 두 달은 아이들의 입시 준비가 정점을 찍게 될 것이기에 그 시간 동안 탈진하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아이들만 따라다니지도 않아야 한다.
이제 워밍업은 끝이 났다. 내 휴직의 본 게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오늘의 감상,
둘째의 여름방학 입시특강이 7월 중순부터 시작하여 개학과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 한 달의 시간 동안 내 차의 주행거리는 무려 2,500킬로미터에 달한다. 장거리도 아닌 시내주행만으로 이 정도의 거리를 찍었으니 가히 나라시 택시기사라 불려도 무방할 지경이다. 운전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체증이 심한 시내주행은 대략 난감이다. 부쩍 운전 중 짜증이 늘었던 나에게 오늘 큰 웃음을 준 차가 있었다.
차 뒷유리에 온갖 사설을 늘어놓는 차를 많이 보아온 터라 대한민국은 참 TMI 사회라 생각해왔다. 영문 이니셜로 이름을 새기고 하트 문양을 가운데 넣는 것은 이제 한물갔지만, 아이들의 혈액형을 적어놓고 위급 시 먼저 구해달라는, 응급조치의 ABC에 해당하는 뻔한 말을 늘어놓는다거나 차 안에 탄 아이들의 성향(착하고 예쁜, 까칠한 등등) 내지는 구성(남매, 쌍둥이 자매 등등)을 알려주는 것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최근에는 고령사회를 대변하듯이 어르신 운전 중이라고 쓰여 있는 차도 보인다.
그런데 오늘 내가 본 것은 그 참신함이 남달라 소개해 본다.
임산부가 타고 있습니다.
태명은 축복입니다.
게다가 초보운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