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의 합리화를 정상이라고 믿고 싶은 자들의 기만술
비정상적인 상태가 지속되면 인간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거나 그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그 환경에서 벗어날 방법이 요원하거나 비정상적인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 환경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면 인간은 비정상적인 환경을 정상으로 인식해 버린다. 이것이 소위 적응이다. 이 놀라운 현상을 우리는 '진화'라는 거창한 단어로 포장해 왔다.
진화는 매우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단어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은 모든 생명체가 자연환경에 적응해 가는 현상을,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자연환경에 적응한 생명체만 살아남게 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단어가 온갖 바람직한 현상을 비유할 때 동원되면서 단어의 품격을 과도하게 높여버렸다. 더구나 자연환경 혹은 생태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종을 일컫던 이 단어가 이제는 엉뚱한 곳에서 남용되고 있다.
특히, 사회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두고 진화라는 단어를 들먹인다면 그것은 남용을 넘어 왜곡의 단계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사회, 좁게는 조직 환경이 극한의 자연환경에 비유될 수 있지만 그것이 불가항력의 자연재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주어진 환경이 갖는 모순을 외면하고 거기에 저항할 용기가 없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한 궤변일 뿐이다. 자신이 처한 사회 환경이 불합리하거나 비정상적이라면 거기에서 벗어나거나 잘못된 관행을 고치기 위해 나서야 한다.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생존의 법칙이다. 적자생존의 논리를 사회환경에 대입하는 오류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유는 인간의 나약함과 비겁함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정상적이지 않은 것을 관행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이를 옛사람들은 소인배라 불렀다. 이 단어에는 발끈하는 인간들이 진화를 남용하는 자들이다. 당신이 주어진 환경의 모순에 대해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함이 아니다. 그 불합리한 환경 안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익을 좇기 위함이다. 그래서 당신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다. 수오지심이 없는 자를 맹자는 비인이라 했다. 그는 소인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 아니다.
나는 이 모든 비정상의 합리화 내지는 정당화를 넘어서 그것을 정상이라고 왜곡하는 인간들을 향해 당신은 그저 변태가 되었을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우리는 소인배보다 변태라는 말에 더 발끈한다. 그런데 비정상을 정상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욕망을 채우려는 당신을 변태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가?
변태의 사전적 정의는 ‘정상이 아닌 상태로 달라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