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wledge Consumer

2017. 3. 9. 에 했던 결심

by 낙산우공

유시민 작가가 과거에 정치 은퇴를 선언하며 내세운 자신의 새로운 직업은 '지식 소매상'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걸쳐 다방면의 지식과 그 습득 경로를 이해하고 있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저술활동으로 업을 삼겠다는 의지가 함축된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를 새로운 직업군의 탄생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 지식을 창조하는 것만큼 쉽지 않은 게 지식의 중간자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의 저술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지식 소매상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런 역할을 하기에 최적의 인물로 보이긴 한다. 그는 누구보다 스마트한 뇌와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언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문장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항소이유서를 읽어보았다면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솔직히 내가 읽은 그의 글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으면서 그의 콘텐츠에 공감하기보다는 그의 소박한 듯 유려한 문장에 반하였다.

따라서 지식 소매상이라는 직업은 아마도 극소수의 축복받은 인물들에게만 허용되는 제한된 일자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직업을 선택한 그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어렸을 적에는 지식을 생산하는 자가 되고 싶었으나, 자의 반 타의 반 역사의 격랑 속에 몸을 던져 살다가 때를 놓쳤다. 그래서 가진 재주라고는 남이 생산해 놓은 지식을 이해하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그것을 업으로 삼았다. 겸손한 듯하면서 사실은 매우 오만해 보이기까지 한 답변이지만, 이 또한 그의 말이기에 대중에게는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유시민 작가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다. 그토록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본인의 이상이나 야망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전개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한 강연에서 굉장히 불우한 환경을 딛고, 학자로서 성공한 교수님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고 싶지만 잘하지 못하는 일을 빨리 포기하는 것이다."

이 분은 내 기억에 학업을 지속할 수 없는 환경에서 일찍 직업세계에 들어섰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고 주경야독하여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선 입지전적인 삶의 이력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매우 치열하게 주어진 환경을 극복해 낸 분이기에 현실적이지만 잔인하게까지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렇듯 생업을 갖는다는 것은 나의 취향과 관심보다는 사회적 수요와 그것을 충족할 수 있는 자신의 기본적인 소양이나 재능과 관계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꿈을 포기하고 살 것인가? 이 질문에 나는 좀 다른 답을 하고 싶다. 우리는 꿈에 대해, 장래 희망에 대해 매우 왜곡되었으나 천편일률적으로 표준화된 틀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요즘 좀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들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에 앞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앞의 교수님의 경우,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와 더불어 그것을 내가 잘할 수 있는가를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복잡하게 절차화된 접근 방식이 꿈을 희석화시켰다. 우리가 인식하는 꿈은 장래희망이나 장래의 직업, 장래의 명성, 장래의 성공과 등식화 되기 일쑤다. 이것을 나는 명백한 오류라고 감히 말하고 싶은 것이다.

꿈은 진행형이다. 미래의 꿈을 위해 현재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꿈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면 그것은 꿈이 아니다. 꿈으로 형상화된 사회적 목표에 매몰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다가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아이들이 나온다. 꽃 같은 나이에 그 넘쳐나는 생명력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시들어 죽고 만다. 그 아이들은 꿈을 꾸어보지도 못했고 꿈을 꾸는 방법도 모른 채 세상이 숭배하는 제일주의에 빠져 재능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명성에 취해서 말이다. 그것이 자신의 적성과 취향에 맞았다면 그 아이들은 그나마 생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아이들은 절망과 실의에 빠져 어떻게 헤어 나올지 모른 채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청춘은 방황하는 것이 정답일지 모르나,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방황이 아니라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쩔쩔매는 방황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루저라고 냉정하게 폄훼하고 있다. 과연 이 사회가 건강한가?

작년에 중학교에 입학한 딸아이는 자율학기제라는 명목하에 진로탐색이라는 특성화된 1년을 보냈다. 내 아이가 경험하는 학교의 진로탐색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설익은 정책이 얼마나 엄청난 폐해를 남기는가였다. 자율학기 1년을 보낸 딸아이는 더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딸아이의 고민을 지켜보면서 내가 해준 이야기는 이랬다. 진로탐색이 장래의 직업을 결정하는 과정은 아니다. 세상에 무수히 많은 직업군이 있는데, 학교가 너와 직업을 맺어주는 중매쟁이도 아닌데 어떻게 1년의 진로탐색 수업만으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겠는가. 설령 네가 대학에 들어간다 하여도 너의 직업은 어떻게 바뀔지 모르고 세상은 그렇게 다원화되어 있다. 불안해하지 마라. 네가 원하는 너의 일을 찾을 때까지 엄마, 아빠가 지원해 줄 수 있다. 그 정도는 아빠가 할 수 있다. 그저 시험 부담이 조금 줄어든 한 해를 보냈다고 생각해라.

꿈과 직업이 연결되어 있다면 행복하겠으나, 앞의 교수님이 말한 것과 같이 우리의 욕망은 우리의 재능과 닿아 있지 않다. 그런데 그것을 과감히 포기하라는 교수님의 말에는 난 동의할 수 없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살면, 평생 후회가 남는다. 그것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잊히지 않는다. 나에게 재능이 있건 없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정말 나에게 맞는 일이건 아니건 그건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무조건 시도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청소년기와 청년기의 긴 시간이 주어진 이유다. 나의 욕망을 직시하는 눈을 갖도록 하는 것이 첫 번째다. 그리고는 스스로의 고민과 결정의 과정만이 남는다. 그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그렇게 성인이 되어야 한다. 사회는, 가족은, 그것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

초등학교 몇 학년까지 영어를 떼고, 중학교에 들어가면 수학만 할 것이 아니라 과학을 해야 하고, 요즘 뜨는 입시 군은 어디이고, 어떤 전공이 좋고, 어떤 직업이 안정적인지를 코칭해 주는 부모의 역할은 집어치워라. 아이가 갱년기에 느닷없는 제2의 사춘기를 맞아 방황하게 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나의 꿈은 과학자였다. 아마도 아인슈타인 전기를 읽고 난 후였던 듯하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꽤 난해한 일본의 과학서적과 월간지를 탐독하였다. 그런데 나는 중학교 이후 과학에 흥미를 서서히 잃어갔다. 아마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에는 나의 지적 능력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그리고 형편없는 입시 위주의 수학과 과학교육 시스템. 이 두 가지 이유에서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즉 스스로의 재능 없음과 용기 없음 그리고 시스템의 폐해가 모두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사회의 수요에 맞는 전공과 나의 적성을 교묘하게 줄타기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의 나는 과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과학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과학분야의 지식 생산자가 될 수도 없고 지식 소매상이 될 재능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정말 다행히도 어릴 적 꿈을 잊지 않고 있는 탓에 지식의 소비자가 될 정도의 소양은 갖추고 있다. 그 덕분에 나의 중년은 좀 더 풍요로워지고 있다. 나는 나름 안정적인 생업에 종사하고 있고, 인류가 17세기 과학혁명을 통해 이뤄놓은 놀라운 지식의 축적물을 향유할 수 있는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나는 어릴 적 꿈을 실현하고 있다. 꿈은 혼자 꾸는 것이다. 같은 꿈을 꾸는 이는 있겠지만, 하나의 꿈을 누군가와 함께 꾸는 일은 없다. 내 꿈을 이뤘는지를 세상에 밝힐 이유는 없다. 나는 지식소비자로서 내 꿈을 실현하고 있는 것에 만족한다.

직업은 꿈을 구현하는 수단 중 하나일 뿐, 전부일 순 없다. 꿈을 이루는 방식은 다양하며, 재능과 소양과 잠재력과 정신력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 당신은 꿈꾸고 있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이 꿈꾸어준 일을 이루려고 바둥거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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