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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Jul 14. 2021

변태라고 불리다

아이의 언어습관(2014. 5. 9)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쁜 말이나 행동은 금세 따라 한다. 내 아이에게서 유난히 거슬리는 모습들은 대부분 내 평소 행동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그래서 더 거슬린다. 그런 아이들이 학교에 모이면 서로 부모에게서 배운 말투와 행동을 따라 하니 삽시간에 온 아이들에게 전염된다. 내 아이에게서 내게서 온 것 같지 않은 거슬리는 말투나 행동을 본다면 십중팔구 친구의 아빠나 엄마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다.

 

그렇게 가끔 우리 아이가 쓰는 단어 중에 유독 거슬리는 말이 '변태'라는 표현이었다. 이건 나나 우리 집사람이 쓰지 않는 단어이기에 생소함을 넘어 당황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아빠들만 모아놓고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강사로 오신 선생님이 아이의 그릇된 말투나 표현은 즉시 고쳐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예로 들었던 표현이 '변태'였다. 당신의 아이가 어느 날 그 말을 쓰기에 따끔하게 혼을 내어 주었다는 것이다.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유행처럼 쓰는 나쁜 말의 전형적인 사례가 '변태'라는 것이다.

 

우리 큰 아이가 처음으로 '변태'라는 말을 쓴 건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아느냐고 물었고, 우리 아이는 대개 이런 경우에 아이들이 '변태'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런 경우'란 내가 딸아이에게 볼에 조금 강하게 뽀뽀를 한 경우였다. 나는 불쾌함을 넘어 몹시 화가 났다. 적절한 비유가 아니기도 했으나, 딸 앞에서 아빠가 '변태'가 되었다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남이 하는 말이라고 함부로 따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변태'라는 표현은 그중 죄질이 아주 나쁜 말이다. 특히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은 엄청난 결례라고 이야기해 주고는 회초리를 들어 아이의 손바닥을 따끔하게 내리쳤다. 꼭 기억하고 조심하라는 뜻으로. 물론, 그 뒤로도 아이의 입에서 그 단어가 무심코 튀어나올 뻔한 일은 있지만 착실한 우리 큰 애는 꽤 조심했던 기억이 난다.

 

큰 아이와 세 살 터울의 둘째 놈이 '변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건 그보다 조금 빠른 유치원 시절이었다. 나는 첫 아이 때 기억이 떠올라 따끔하게 혼내줄 요량으로 그 말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다. 둘째 녀석은 당당하게 말했다. 당연히 안다고. 우리 둘째가 아는 '변태'의 의미는 이러했다.

 

친구와 화장실을 갔을 때, 옆에서 친구가 소변보는 것을 한번 쳐다보면 정상, 두 번 쳐다보면 '변태'라는 것이다.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곳(우리 아이는 이렇게 부른다)을 훔쳐보면 '변태'라는 것이다. 한 번은 무심코 시선이 머물 수 있기 때문에 양해가 되지만 두 번째 쳐다보았다면 틀림없이 훔쳐보려는 의도가 숨겨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정상이 아닌 상태가 '변태'다. 남의 소중한 곳(?)을 유심히 쳐다보는 일은 정상이 아니다. 따라서 '변태'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의미는 이해하고 있으나 아빠에게 쓰는 말은 아니라고. 이야기는 하였지만 썩 개운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날, 아이에게 내가 취한 행동은 아마도 속옷을 조금 내리고 엉덩이를 살짝 만졌거나 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둘째는 남자아이라서 편한 마음에 가끔 짓궂은 장난을 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내가 무심코 행한 장난들이 사실 다른 이를 통해 일어났다면 끔찍한 '변태'행위인 경우가 맞다. 그 생각에 이르니 소름이 돋았다. 아빠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결국 이 아이가 성추행이나 범죄행위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도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이제 통통한 아들의 엉덩이도 함부로 만지기 어려운 세상이다. 정말 '변태'스런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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