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있는 건 나일까?(2014. 7. 7)
대부분의 아빠들을 딸바보라고 한다. 아마도 여자라는 이성의 존재를 출생에서 성장까지 쭈욱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딸을 키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를 먹고 이성을 만나 연애를 하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결국 결혼을 하게 되면, 출산과 육아에 주택담보대출과 원리금 상환, 게다가 이직과 격무 등등이 겹쳐오면, 우리는 이성의 존재를 망각하고 이성(?)을 잃은 채 둔감한 아저씨로 퇴화한다. 그곳엔 생계나 생활은 있지만 여백이 깃든 삶은 없다. 그렇게 빡빡한 일상과 오만가지 의무감을 이고 지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아빠들이 접하는 유일한 이성은 딸이 되어버리는지도 모른다. 아내가 듣는다면 서운할 일일지 모르겠으나, 숨 막히는 일상의 수고로움에 겨워 그 서운함마저도 오래 느끼지 못하리라. 대한민국 40대 가장의 삶이란 부부가 다를 바 없다.
일반화할 수 없는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딸은 한결 환경에 순응적이고 규율에 엄격하다. 누구나 형식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삶을 자유롭게 영위하고 싶은 자유의지가 있다. 여기에 얼마나 자기 통제력과 현실감각이 작용하느냐가 확률적으로 무난하고 평이한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나눈다. 우리 딸아이는 일요일 저녁 예능프로그램을 사수하려는 의지가 강하지만,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오후 시간을 꽉꽉 채워 기말고사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주말 밤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여 밀린 공부를 메꿀 것인지를 고민하고 엄마와 타협한다. 반면에 우리 아들은 자유의지만 강하다. 그 강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아버리고 나면 눈앞의 욕망을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어쩌면 이 아이가 더 영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생떼는 우리를 피로하게 하지만, 생떼에 곁들이는 가공할 애교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니 말이다.
아빠를 닮지 않아 무럭무럭 자라나는 키(?)와 뛰어난 학습능력, 너그러운 성품과 착한 마음씨, 타고난 성실함 등등 긍정의 힘이라고 불릴만한 미덕을 충만하게 내재하고 있는 딸아이를 보고 있으면 가끔 기특함을 넘어 고마움을 느낀다. 아이들을 철부지라고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아빠들은 아이와 함께 철이 든다. 통제되지 않는 그들과 지지고 볶으며 자신의 부족한 철딱서니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행히 이런 아이를 만나게 되면 속된 말로 '넝쿨째 굴러온 아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그런 우리 아이에게 굳이 단점(?)을 찾으라면, 도대체가 대책이 없는 징징 거림이다. 태어나서부터 유난히 잠투정이 심해 한 시간을 넘게 안아줘야 잠이 들던 아이는, 다 큰 지금도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징징거림'이 몸에 배었다. 듣기 좋은 말도 삼세번이라고 하는데, 이 징징거리는 소리는 들려오는 순간부터 불편한 심기를 건드린다. 12년간 한결같은 것을 보면 좀처럼 고쳐지지 않을 듯하여 걱정이 조금 앞서기도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징징거림은 문제의 해결보다는 심화에 일조하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나를 근심스럽게 하는 것은 다 큰 어른 중에도 상당수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징징거림이 아이와 다르지 않은 것은 대상과 시기를 가리지 않으며 갈수록 정도가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초장에 잡을 방법을 궁리하지 않으면, 내 아이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 같아 고민거리다.
아이에게 부드럽게 타이를 때, 이렇게 말한다. "그러는 거 아니야.... 징징거리는 거 아니야..., 우리 OO이, 다 컸는데 아가처럼 그러면 안돼...'
이런 타이름을 어른에겐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요즘 자주 이런 말이 턱밑까지 치밀어 올라온다. 사무실에서 말이다. '그러는 거 아니야... 어른이 징징거리는 거 아니야...'....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이제 딸아이는 징징거리지 않는다. 대학에 갈 나이가 되니 자연스럽게 고쳐졌다. 다만 이게 전염이 되는 것인지 자꾸 나에게 옮긴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