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폭, 깊이 그리고 높이

사유의 힘(2016. 3. 10)

by 낙산우공

휘트버넷의 '소설 작법'은 작가들에게 교과서와 같은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은 작가가 갖추어야 할 다양한 덕목들을 조목조목 나열해 놓고 있다. 항목별로 대표적인 기성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확신을 더해 준다. 읽다 보면 작가의 풍부한 지식의 총량에 놀라게 된다. 이럴 때면 이런 이들은 나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늘의 축복을 받은 천재들... 그들만이 세상을 바꿀 만한, 아니 한 인간의 생각을 변화시킬 만큼 아름다운 글을 남기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이 있어 잠시 소개한다. 작가가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사유의 폭, 둘째는 사유의 깊이, 마지막은 사유의 높이.


사유의 폭은 경험에서 나온다. 여기서 경험이란 직접 체험하는 살아있는 삶의 경험을 말한다. 물론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얻게 되는 경험도 있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전업작가의 길을 가기 전에 다양한 삶의 이력을 쌓은 작가들을 높이 평가한다. 생생한 삶의 경험이 없이는 폭넓은 사유를 할 수 없다는 얘기다. 나는 이것을 현상의 발견이라고 이해하였다. 사유의 폭을 갖추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체득한 직관력이 있어야 하고, 그 직관력이 남들은 무관심하게 돌아서는 소소한 사건, 사고, 일상적인 장면에서 사유의 소재를 발견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다음은 사유의 깊이다. 깊이란 어떤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이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일상적인 현상에서 다층적인 의미를 잡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사건이든, 사고이든, 혹은 찰나의 장면이든 관계없이 그 현상의 특이점을 발견해 내고 그것을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서 파악하고, 그 현상이 나타내는 함축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이다.


마지막은 사유의 높이다. 높이란 견해다. 내가 발견하고 해석한 현상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광범위한 세계의 무수히 많은 현상들과 직면하지만 그것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데에도 급급한 형편이다. 아니 대개의 경우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일들에 무관심하고 그것을 외면해버리기 일쑤다. 삶에 치여 그런 것들을 되돌아볼 여유조차 없기 마련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는 이라면 작가의 자질이 있는 것이리라. 다만, 그 경험하고 이해한 현상들에 대해 설득력 있는 자기만의 주장을 펼칠 수 없다면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이야기가 인상 깊게 기억되는 이유는, 그 세 가지가 꼭 작가에게만 적용되는 덕목은 아니라는 것이다.


40대 중반의 고개를 넘는 중년의 나에겐 오히려 인생의 목적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유의 폭(경험)과 깊이(이해)와 높이(견해)를 갖추는 일. 지난한 길이겠지만 말이다. 니체는 '깊이와 무게'를 혼동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깊어지고 있는지 혹은 무거워지고 있는지를 구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여기서부터 막힌다. 그리고, 내가 깊어지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무거워지고 있다는 것은 실증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린 배부른 돼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