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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게 죽기

죽음을 맞는 자세(2019. 5. 2)

by 낙산우공

최근에 읽고 있는 어느 책의 한 구절을 보면서 일 순간 멈춰 버린 적이 있다.​


"하루를 잘 보내면 그 잠이 달다. 그렇듯이 인생을 잘 보내면 그 죽음이 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죽기 전에 했다는 말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려니 하고 무심코 넘어갈 수도 있지만, 요즘의 내 잠이 달지 않았기에 이 글귀를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인생을 잘 보내서 달콤한 죽음을 맞는 것은 고사하고, 하루하루의 잠조차 개운치 않은 내 일상은 분명히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수면시간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운동량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샤워를 하고 최적의 상태에서 잠에 들고나서는 온갖 무의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꿈속을 헤매거나 새벽 일찍 깨어 잠 못 드는 일이 잦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단잠을 자본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어릴 적 딸아이가 신나게 놀고 체력이 모두 방전되어 스러지듯 잠에 빠져들었다가는 두어 시간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게 자고 깨어나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밝게 웃으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잘 잤쪄!!!!"​


이 말의 의미는 이제 난 모든 준비가 되었으니 다시 놀아달란 뜻이었다. 집사람이나 나는 항상 아이의 이런 반응에 힘이 빠졌으나 한편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아이는 언제나 즐거운 놀이에 푹 빠져 정말 젖 먹던 기운까지 완벽하게 소진한 후에야 잠이 들었고 그렇게 몇 시간 충전이 되면 다시 행복한 표정으로 놀 준비가 되었음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 아이의 맑은 정신세계가 항상 부럽기도 하였고, 또 누구를 닮아 이토록 에너지가 넘쳐날까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당황스럽게 웃는 우리에게 아이는 늘 속상한 표정으로 묻곤 했다.

왜 웃느냐고?​


아마도 자기를 놀리는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신나게 놀고 깊게 잤다가 다시 일어났을 뿐인데,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들 웃고 난리일까... 그렇게 속상해했었다. 하지만 내 속마음은 늘 부러움이었다. 이토록 삶이 단조롭다면 세상의 시름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것이다. 늘 부러웠다. 마음껏 즐기고 푸욱 잘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정녕코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무심코 무기력하고 무의미하게 반복되고 있는 시간이 쌓이고 쌓여 이제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건만 난 10년 후를 꿈꾸며 오늘을 버틴다. 내가 10년 후에 살아 있을지조차 보장할 수 없는데 말이다. 가끔씩 들여다보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블로그에는 이런 글귀가 올라와 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이것이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오래전 알고 지냈던 분이 해준 말도 비슷했다. 내가 1년 후에 살아있을지 모를 뿐 아니라,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전혀 알 수 없다. 우린 계획한 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과정에 얼마나 무수히 많은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는가? 그저 현재의 삶에 충실한 것 외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그리고 오늘 우연히 읽게 된 인터뷰 기사에서 "쓸모 인류"라는 책의 주인공을 접하게 되었다. 가회동 집사라고도 일컬어지는 그가 하는 이야기는 단순했다.​


"Just do it!"​


자신의 쓸모는 본인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나의 쓸모를 사회가, 조직이, 타인이 정해주기를 기다리는 삶은 불행하다.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구실을 찾기 위해 사는 것이다. 사람 구실이란 없다. 세상이 정해준 답이란 없다.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게 답을 구하지 말고, 내 안에서 답을 찾아라. 내 욕망이 가리키는 길을 보아라.​


참으로 오랫동안 되뇌고 있는 이 말들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자유라는 선택에 따르는 책임이란 무거운 짐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언할 수 있는 건 지금 나의 잠은 달지 않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나의 죽음도 단 맛일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달게 죽기 위해서는 지금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삶에 대한 태도이든, 삶 자체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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