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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Jul 27. 2021

단합대회, 체육활동 그리고 레크리에이션

코로나가 멸종시킨 것(2014. 3. 22)

대한민국 조직사회의 연례행사, 1박 2일 단합대회에 빠지지 않는 코너가 체육활동과 레크리에이션이다. 썰렁하고 뻘쭘한 낮시간을 채우는 건 땀 뻘뻘 흘리며 자연스럽게 바디 어택과 스킨십을 유도하는 승부게임 만한 것이 없고, 데면데면 술만 홀짝거리기 아쉬운 밤 시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레크리에이션 강사는 화려한 음악과 현란한 춤으로 적당히 오른 술기운에 기대어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불문한 망가짐을 부추긴다. 낮시간 적당한 스킨십으로 낯가림이 덜하여진 사람들은 밤 시간 개그맨 뺨치는 강사의 개인기에 덩달아 헝클어진다. 그 기세를 몰아 광란의 노래방이 진행된다. 이 단합대회 공식은 대한민국에서는 몇 안 되는 검증된 레퍼토리다.

 

얼마나 화끈하게 망가지느냐, 그리고 얼마나 단숨에 권위를 회복하느냐를 통해 부서장의 리더십과 쿨(cool)함을 비교하게 되는 단합대회는 결국 보스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린다. 체육대회 보너스 몇 점에 목숨을 걸고, 팀워크로 똘똘 뭉쳐 응원가를 만들고 88 올림픽 이후로 자취를 감춘 매스게임(?)을 지휘한다. 창의적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발현하는 레크리에이션 강사는 어쩌면 대한민국 창조경제를 선도하는 새로운 부가가치, 일자리 창출의 아이콘 인지도 모른다. 가난한 무명 개그맨의 부업으로 전락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물론 말이다. 이런 자리만 되면 물을 만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평소의 저평가를 불식시키고 원나잇 히어로가 된다. 그러나 아쉬운 건 원나잇뿐이라는 사실이다. 조금 운이 좋으면 며칠간 화장실이나 흡연장에서 인구에 회자되고 기껏해야 다음 해 단합대회 며칠 전에 다시 한번 입방아에 등장할 뿐이다. 이들은 분명히 단합대회의 조연이다. 단합대회의 진정한 주연은 이런 자리에서 조차 물을 만나는 사람들이다. 화려한 스펙과 업무능력으로 이미 상당한 존재감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개인기와 적극성으로 탄탄대로의 성공가도에 마지막 철의 장막을 친다. 그 어떤 변수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합대회의 80%에 육박하는 들러리족은 영락없는 엑스트라다. 이들은 영화 '평양성'의 병사 1로도 엔딩 자막에 등장하지 못하는 그저 존재감 없는 고구려군, 혹은 신라군의 일원일 뿐 구별되지 않는다. 물론 대부분의 80%는 주연도 조연도 원하지 않는다. 개중엔 역할을 맡을 수 없다는 현실을 잊기 위해 좀 더 시니컬한 뒷담화를 주도하기도 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역할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저 촬영이 빨리 끝나서 집에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조직사회의 단합대회는 존재감과 리더십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10%의 주연과, 불리한 평판을 뒤집으려는 10%의 조연을 위해 해마다 빠지지 않고 열린다.

 

아니, 하나 더 있다. 주연도 조연도 엑스트라에도 관심이 전혀 없지만, 1박 2일의 근무 면제와 공짜로 제공되는 식사, 술, 춤, 노래 그 모든 것을 허락하는 해방구(단합대회)를 온몸으로 즐기는 부류다. 그들은 노래방 옆자리에 부서장이 있는지 따위에는 관심 없고, 부르고 싶은 노래가 선곡표에 있는지, 그리고 몇 곡까지 부를 수 있을지에만 집중한다. 특별히 준비한 일명 땀복은 체육활동 내내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저녁 식사자리에 등장하며, 땀복의 기능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밤새 땀을 뻘뻘 흘리며 온몸을 불사른다. 엊그제도 그런 이를 한분 보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오늘의 진정한 승자는 당신이라고 말이다.

 

나는 1박 2일 동안 적어도 스무 번 이상은 시계를 보았던 80% 엑스트라다. 늘 그랬지만 말이다. 그것도 일당 몇만 원이 아쉬워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도 아니니 거기서 연기가 나올 리 없다. 나는 연기를 해야 할 동기를 부여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고구려군 병사 254번에게 표정연기를 요구하는 감독은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의 모든 건전하고 바른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내 부정적 가치관이 거북할 것이다. 그저 당신들이 말하는 '루저'의 푸념쯤으로 넘겨주었으면 감사하겠다. 알랭 드 보통의 강연에서 들은 말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과거에는 인생의 길흉화복을 운에 따른다고 생각했으나 현대인은 이를 성공과 실패로 가르며 그 대상은 위너와 루저로 분류한다고 한다. 그래서 불행하다는 것이다. 위너도 루저도 말이다. 성공하던지 실패해야 하니 말이다.




코로나19 대유행 사태는  직장의 회식과 연찬회를 종식시켰다. 감사한 마음이 들기에는  희생이 너무나 크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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