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쁨과 열심은 동의어가 아니다.

나현

by 오늘도 나마스떼

새해가 밝았습니다! 저는 연말 휴정기를 이용해서 여행을 다녀왔어요. 지선 선생님의 편지는 핀란드 반타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읽었는데, 타국의 공항 의자에 기대어 편지를 읽고 있으니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그렇게 서운하지 않더라고요. 편지가 어서 빨리 돌아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여행은 좋아하지만, 장시간 비행은 반복할수록 힘들게 느껴져 어떻게 하면 그 시간을 잘 견뎌볼까 궁리하다가 공항 가기 직전 요가 수련을 하기로 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앉은 자세로 굳어갈 몸에게 잘 부탁한다고 주는 한약이라고 생각했어요.


인천 공항까지 차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공세권에 살고 있는 이점을 이용해 회사에서 마치자마자 부랴부랴 요가원에 갔고, 요가원에서 부리나케 공항으로 향했어요. 그러나 예상보다 지체되는 시간이 생겼고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서는 항공사로부터 언제 도착하느냐는 전화를 받기도 했지요. 곧 짐 부치는 걸 마감하니 그전에 도착할 수 있는지 묻는 전화였죠.


잠시 쫄깃한 심장으로 캐리어를 공항에 두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지 생각해 봤는데, 캐리어에서 속옷과 책만 꺼내면 배낭 하나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다행히 출발 1시간 전에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짐을 부치는 승객이 되어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했답니다.


목적지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였는데, 경유해서 가느라 14시간 동안 핀란드 헬싱키로 갔고, 다시 헬싱키에서 4시간 걸려 다시 바르셀로나로 가는 여정이었어요. 긴 비행시간이 공포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감금된 상태에서 마음껏 책과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기에 꼼짝없이 책을 읽었고, 책이 지루해질 무렵에는 영화를 봤어요.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정재승 작가의 ‘열두 발자국’, 민은기 작가의 ‘난생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모차르트, 영원을 위한 호소)’, 이렇게 총 3권을 가져갔는데, 엄선한 보람이 있었어요. 그 어느 때보다 흡족하게 집중해서 읽었고, 이렇게 책을 읽은 시간이 오랜만이어서 독서만으로도 긴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요가 수련의 효과 덕분인지 비행시간은 그럭저럭 잘 흘러가더라고요.




스페인에서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피카소 미술관, 몬세라트 수도원, 바르셀로나 미술관을 다녀왔는데, 어쩌다 보니 이번 여행에서는 가우디(성당), 피카소(미술관), 모차르트(책) 세 명의 천재를 만나는 시간을 보냈더라고요. 세 명의 공통점이라면 다들 천부적인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는 점이었어요.


천재들은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으니 그 재능을 뽐내면서 편하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본업을 손에 놓지 않았던 치열함에 종종 숙연해졌어요.


매 주말이면, 평일에는 잠자고 있던 제 안의 한량이 깨어나 제게 한없는 게으름을 강권하고는 해요. 평일의 바쁨에 대한 보상 심리로 기꺼이 게으름을 허용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일요일 저녁이 되어 한량과는 작별을 고하고, 평일에는 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는 등 시소타기 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새해에는 부디 바쁘게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성장지향형으로 엑셀레이터 밟기를 좋아하지만, 새해에는 자주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느린 시간 속에서 살아보려고 합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새로운 리듬으로 생활해 볼 수 있어서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하루에 하나의 목적지만 다니면서 여유롭게 보내 만족스러운 시간이었어요. 특히 성당 내 스테인드글라스를 비추는 저녁 햇살을 가만히 봤던 시간, 피카소가 변주해서 그린 ‘시녀들’ 그림을 조용히 응시했던 시간이 좋았는데, 둘 다 정지한 것 같은 시간 속에서 비로소 안도하면서 내가 원했던 순간에 당도한 기분이었어요.


요가를 하면서도 종종 정지한 것 같은 시간을 만나게 되는데요. 고양이 스트레칭 자세를 할 때면 시간이 멈추면서 홀로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턱을 바닥에 밀착시키면서 바닥과 눈 맞춤하면서 작고 낮은 존재가 되어 겸손한 마음에 휩싸이게 돼요. 고양이 스트레칭 자세를 하면서 바닥에 턱을 맞대면서 비로소 똑바로 보게 된 매트 위 먼지처럼 가볍고 하찮은 존재임을 다시 깨닫게 되는 시간이랄까요.




이동진 평론가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진행된 심리학 실험을 설명하면서 “바쁨이 곧 악을 초래한다.”는 말을 하였는데요. 심리한 실험은, 학생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발표를 맡기고, 학생들이 발표를 하러 가는 길에 심장 발작을 일으키는 연기자를 투입하는데 그 연기자는 학생들 눈앞에서 쓰러지는데 일찍 출발해서 여유 시간이 많을수록 쓰러진 사람을 도울 확률이 높았고, 늦게 출발해서 여유 시간이 적을수록 못 본 척 지나갈 확률이 높았다는 것이었어요.


여행 전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듣고 ‘왜 바쁨이 악인가’라는 반발심에 위 내용을 한동안 곱씹었는데요. 결국 저는 바쁘게 사는 것을 열심히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았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바쁘다는 이유로 많은 것들과 타협하면서 미루어두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새해에는 새로운 리듬으로 생활하면서 내가 원했던 순간을 많이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새해부터 감기에 걸려 강제로 느린 생활을 하고 있어 새해 목표를 뜻하지 않게 손쉽게 달성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새해에는 언니와 선생님들과 함께 여행을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언니는 여행에서 어떤 순간을 좋아하나요? 언니가 좋았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그림 : 안나현 作, Road to the go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