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가르쳐준 사람들(1)

[오늘도, 사람!]

by 별체


거의 평생 게임을 하며 살아왔다고 봐도 무방한 내 인생의 일등공신은 당연히 아빠다.


활동적인 삶과 거리가 멀었던 유치원생이 가장 좋아했던 건 일하고 있는 아빠의 무릎에 앉아 같이 컴퓨터를 보는 것이었다. 까만 화면 속에서 영어로 된 글자들이 반짝반짝하는 걸 정신없이 보고 있으면 어느새 일을 마친 아빠가 간단한 미니 게임을 실행시켰다.


도스용 비행기 슈팅 게임이었는데, 우주선으로 화면에 떠 있는 별들을 모두 쏘면 끝나는 간단한 게임이었다. 도스용 컴퓨터는 마우스가 없기 때문에 화살표와 스페이스를 이용해 조작해야 했다. 당연히 내 몸도 스스로 가누기 힘들 때니 화살표로 방향 조정은 아빠가 하고 나는 스페이스만 다다다 눌러대면서 신나했다.


게임을 재미있게 하는 딸을 본 아빠의 컴퓨터에는 점점 게임이 한 두개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크면서도 내가 원하는 게임을 아빠에게 부탁하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오락실에서만 할 수 있던 보글보글, 버츄얼캅, 라이덴투, 가디언즈, 테트리스, 철권, 메타슬러그, 스노우브라더스 등을 집에서 원 없이 했다. 펌프가 유행했을 때는 집에서 펌프판과 프로그램을 설치해서 뛸 정도였으니 내겐 집이 오락실이랑 다름없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임이 있다면 단연코 오델로다. 총 64칸으로 이루어진 게임판에서 상대방보다 더 많은 칸을 차지하면 이기는, 일종의 땅따먹기와 비슷한 지능게임이다.


이 게임은 어린 시절부터 약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가 가장 잘하는 게임이다. 머리가 좋아서 잘하는 게 아니라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20년 넘게 계속 반복하다 보니 숙련도가 쌓여서 잘한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조기교육의 힘은 무섭다.


오델로 게임을 처음 시작했던 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아빠가 설치한 오델로는 삼국지를 테마로 한 게임으로, 내가 삼국지 등장인물 중 한명이 되어 다른 캐릭터랑 대결하는 것이다.


삼국지를 아예 모를 때라 잘생겨 보이는 캐릭터로 대충 골라 게임을 시작했다. 규칙도 모르고 무작정 시작한 첫 번째 게임은 당연히 CPU의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그 CPU가 나를 이기고 나서 ‘이런 돌대가리. 저리 꺼져.’ 라고 했다.


꺼지라는 말을 난생 처음, 그것도 컴퓨터한테서 듣게 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시 시작한 게임에서도 완패했는데, 이번엔 ‘어휴, 돌 구르는 소리가 나는군.’ 이라고 했다. 아빠가 옆에서 킥킥거리며 자기가 하는 것을 잘 보라고 했다.


아빠는 룰과 이기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보다 더 나은 대결을 선보였지만 역시나 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대결했던 CPU는 가장 난이도가 높은 제갈량이었다. 덕분에 삼국지를 알기도 전부터 제갈량이 엄청 똑똑하다는 것을 알았다.


제갈량에게 진 아빠는 오기가 생겨서 몇 번씩 다시 도전했고 결국 이겼다. 아빠의 캐릭터는 ‘당신은 나한테 못 이깁니다.’ 라고 했고 제갈량은 ‘흥.’이라고 했다. 왜 우리 캐릭터는 이렇게 점잖게 말하는 거냐며 아빠에게 하소연했다. 아빠는 착한 사람은 나쁜 말 안한다고 했다. 그 때부터 제갈량은 내게 나쁜 사람이 됐다.


그 뒤로 아빠는 오델로의 기본적인 룰과 전략에 대해 알려줬다. 평소에 게임에는 관심도 없던 동생까지 셋이서 쪼르르 앉아 열심히 듣고는 한 판씩 번갈아가며 투지를 불태웠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컴퓨터와의 대결이 재미없어질 때쯤 아빠는 퀴즈퀴즈라는 게임을 설치했다. 퀴즈를 푸는 것 말고도 다양한 보드게임을 즐길 수 있었는데, 그 중 오델로가 있었다. 여기서는 유저와 유저끼리 대결했기 때문에 컴퓨터와의 대결보다 훨씬 흥미진진했다. 이 때부터는 아빠와 동생과 나, 각자 캐릭터를 하나씩 만들어 우리끼리 대결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경험이 쌓이면서 고수가 됐지만 여전히 나는 아빠와의 대결만큼은 자주 패배하는 사람이었다. 경험으로 따지면 일하느라 바쁜 아빠보단 게임만 하던 내가 더 많았겠지만 아빠는 확실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평정심도 잘 유지했기 때문에 실수해도 실수한 티가 나지 않았고 심리전에도 능했다.


아빠를 이기기 위해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아빠한테 게임하자고 졸랐다. 퇴근하고 와서 겉옷도 벗기 전의 아빠를 컴퓨터 앞에 끌고 오고, 야근하고 늦게 들어와서 바로 자야 되는데도 조르고, 주말에 낮잠 잔 지 10분도 안 됐는데 깨워서 마우스를 손에 쥐어줬다.


이상하게도 아빠는 그런 내 행동에 한 번도 짜증낸 적이 없었다. 비몽사몽하면서도 묵묵히 나와 게임을 했다. 한 번 져주면 내가 잠잠해질 걸 알면서도 아빠는 매번 최선을 다해 이겼다. 도저히 실력으로 이길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낀 사춘기의 어느 날, 나는 결국 아빠에게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딸이랑 하는데 꼭 이렇게 다 이겨야 돼? 져줄 수도 있잖아! 진짜 매정하네!”


아빠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빠가 져주면 너 재미없다고 아빠랑 안할 거잖아.”


순간 말문이 막힌 나는 “아, 몰라!” 하고 쿵쿵거리며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생각해보니 아빠 껌딱지였던 시절을 지나 사춘기에 들어서부터는 아빠와의 대화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게임 얘기 말고는 나눠본 대화가 기억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닌데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뭔가 머쓱해졌지만 다시 나가 할 말도 없어서 그냥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켰다.


잠시 뒤, 노크하고 들어온 아빠는 내가 다른 사람과 오델로를 하는 것을 보고 말없이 슬그머니 옆에 앉았다. 나도 모른 척 하며 가만히 게임에 집중했다.


아빠와 나의 대화는 줄었어도, 오델로를 할 때만큼은 지금처럼 거의 함께였다. 둘 중 누구 한 명이 오델로를 하고 있으면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서로의 게임을 끝까지 지켜봤다. 한 판이 끝나갈 때쯤 아빠가 말을 꺼냈다.


“다음엔 져보도록 노력할게.”


져주는 것도 아니고 져보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에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푸하하! 그건 됐고 지금 이거나 봐줘. 어디다 둬야해?”


훈수가 필요 없는 상황인데도 슬그머니 훈수를 부탁하는 나를 보며 아빠도 웃었다. 아무래도 무뚝뚝한 우리의 대화에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오델로가 필요할 모양이었다.


아빠가 알려준 곳에 내 돌을 놓으면서 생각했다. 이제는 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러니 져주지 않고, 이기지 않는 그런 우리의 승부가 가능한 오랫동안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이전 08화비대면의 언어(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