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비대면의 언어들이 항상 날카롭고 아프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 폭력적인 문장들을 쏟아내는 사람의 잔상이 짙었을 뿐,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식 내의 문의를 하고 해결되면 고맙다는 말을 하곤 했다. 거기에 말의 중요성과 함께 상담사의 고충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막무가내 전화의 빈도수는 많이 줄었다.
회사에서도 상담사의 처우 개선과 정신건강을 위해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곤 했다. 자체적으로 어린이집을 운영해서 부모가 일을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힘을 썼고, 회사 내에는 심리상담사와 안마사가 항상 상주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복지는 물론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예정에도 없던 인센티브와 휴가를 자주 지급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많은 대책 중에서도 가장 효과가 좋다고 느꼈던 방법은 정말 의외의 방법이었다. 상담사 연결 전 대기시간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음성멘트로 바꾼 것이다. 어린 아이, 지긋한 노인, 생기발랄한 청년의 목소리로 ‘잠시 후에 상담해주실 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우리 엄마에요. 딸입니다. 누나입니다.’ 등의 음성을 들은 후 상담이 시작되면 화가 잔뜩 나 있던 고객들도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차분하게 문의해주셨다.
고객의 문의 건은 단순한 서비스 추가/변경/삭제 건부터 통신사의 귀책에 관한 건, 고객이 정책을 잘못 이해한 경우 등 다양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자신 있었던 문의는 요금제 상담이었다.
주로 나이가 지긋하신 중장년층 고객이 많이 문의하시는 상담인데, 고객의 정확한 니즈를 파악하고 맞춤형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이 재밌었다. 젊은 층의 고객들은 어플 사용이 능숙하기 때문에 요금제 변경 건으로 전화하는 일은 많지 않아서 참 아쉬웠다.
요금제 문의에서 고객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요금이 적게 나오는 것이다. 고객이 요금제를 바꾸고 싶다 해서 그 말 곧이곧대로 ‘변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왜 바꾸고 싶어 하는지 숨겨진 의도를 알아야 정확한 응대를 할 수 있다.
의외로 고객들이 많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낮은 요금제를 쓰면 요금이 적게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핸드폰 사용량을 생각하지 않은 채 적은 요금제를 쓰면 오히려 초과 사용분으로 인해 요금 폭탄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사용량을 정확히 알아보고 맞는 요금제를 쓰는 것이 가장 좋다.
오징어 할아버지도 그런 경우였다. 매달 5만원 상당의 요금제를 쓰는데 이번 달 청구금액(지난달 사용분)이 갑자기 20만원이 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일 낮은 표준 요금제로 변경해달라고 문의를 주셨다.
지난달 사용량을 살펴보니 데이터 사용량이 요금제에서 제공하는 양을 훌쩍 초과하고 있었다. 이 경우에는 요금제를 낮출 것이 아니라 요금제를 높여서 데이터 기본 제공량을 높이거나, 옵션요금제를 추가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런데 사용량을 유심히 살펴보니 오징어 할아버지는 지난 달 갑자기 데이터 사용량이 늘어났을 뿐, 그 이전까지는 자신의 요금제에 맞게 사용하고 있었다.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갑자기 요금폭탄을 맞을 정도로 데이터를 쓰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거기에 요금 청구내역을 더 살펴보니 소액결제 금액도 있었다. 고객의 동의를 얻어 내역을 확인해보니 어린이 전용 게임 내 재화 구매로 7만원이 결제되어 있었다. 혹시 지난달에 평소와 다른 일이 없었는지 여쭤봤더니, 손자가 방학해서 한 달 내내 자신의 집에 와 있었다고 하셨다. 총 20만원이 넘는 요금의 범인은 할아버지의 손자였다.
요청하신 요금제 변경은 안하셔도 될 것 같다며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오징어 할아버지는 빠르게 상황을 이해하셨다. 손자가 집에 돌아갔으니 다음 달부터는 다시 정상적인 요금이 나오겠다며 허탈한 듯이 웃으셨다. 요금제 바꾸는 것만 정답인 줄 알았다며 친절하게 잘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나 역시도 처음부터 끝까지 인자하고 자상한 말투로 상담을 진행하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기억에 남긴 채 상담을 마무리했다.
한 달이 지난 뒤, 회사에 내 앞으로 커다란 택배상자가 도착했다. 수산업에 종사하시는 오징어 할아버지가 친절하게 잘 응대해줘서 고마웠다며 동료들과 나눠 먹으라고 말린 오징어 100마리를 보낸 것이었다.
선물을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몰라서 고객센터에 다시 전화해 회사 주소를 확인했다고 하셨다.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보내주신 그 마음이 너무 감사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저 잠시 같이 고민해드리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행동을 선의로 받아들이시고, 더 큰 것으로 돌려주신 오징어 할아버지 덕분에 순식간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신기하게도 대면하지 않은 사람에게 지쳐가던 나를 위로하는 것 또한 대면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건네주신 온기 덕분에 나는 당분간 괜찮을 것이고,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온기를 다시 건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끔 예상하지 못한 온기 덕분에 무럭무럭 자라나는 기분이 든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이 온기를 오랫동안, 그리고 자주 기억하는 것뿐이다. 이번만큼은 타인의 감정을 여과 없이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말랑한 내가 밉지 않아서 다행이다.
* 오늘 글에 표현된 통신사 상담정책은 몇 년 전 제가 근무했던 곳의 정책으로 현재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