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눈치의 세계는 미묘하다. 서구권에서는 눈치의 개념을 정확히 표현할 단어가 없는 나라도 많다. 영어로 표현해도 센스나 위트 정도가 그나마 눈치라는 단어를 대체할 수 있다고 한다.
확실한 건 눈치의 세계는 단순히 눈치가 있다 없다로 구분할 수 없는 복잡한 세계임이 틀림없다. 눈치 여부와 상관없이 각자 태도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눈치가 있어도 없는 척 행동하는 사람이 있고 눈치가 없어도 애쓰는 사람이 있다. 안타깝게도 내 친구 미는 전자가 되고 싶은 후자였다.
“야, 눈치가 없으면 그냥 눈치를 보지 말라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
두 달 전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에 성공한 미는 고깃집 테이블에 앉자마자 하소연을 시작했다. 오늘 만남의 주최자는 미다. 새로 만난 직장상사와의 트러블을 하소연하는 것이 목적이다.
앉자마자 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지런히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얘의 하소연을 잠시 끊어야 할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 7시 30분. 우리는 요즘 핫플레이스라는 고깃집 앞에서 30분을 벌벌 떨며 기다린 끝에 테이블에 앉았다.
여전히 출입문에는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가득 있었다. 메뉴판은 쳐다보지도 않고 5분 동안 말만 하고 있는 미의 뒤로 우리 테이블 근처를 서성이는 종업원이 보였다. 불편한 얼굴로 계산대에 서 있는 종업원과 무언의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날카롭게 느껴지는 나와 달리 미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미의 말을 끊어서 무안하게 할까봐 눈치만 보며 어영부영 5분이 지나갈 때쯤 나는 결국 메뉴판을 툭툭 두드리며 미에게 눈짓했다.
“일단 지금 이건 확실히 눈치가 없는 거 같은데….”
“아! 맞네!”
그제야 주문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미는 종업원을 불러 삼겹살 2인분을 주문했다.
“야! 나 항정살 먹을 건데 왜 마음대로 시켜?”
“너 고민할까봐 그랬지. 일단 먹고 시켜 그럼!”
오늘 돈을 내는 건 미고, 모든 고기는 옳고, 나는 너그러우니까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주문으로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를 막아낸 나는 다시 얘의 하소연을 들었다.
삼겹살을 먹으며 들은 긴 이야기를 요약해보자면, 회사에서 미의 업무실수 때문에 상사가 대신 사장님께 혼났다고 했다. 그걸 안 미는 상사에게 초콜릿을 건네며 ‘괜찮으세요? 그럴 수도 있죠. 사장님이 좀 너무하시네요.’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상사가 화를 내며 ‘눈치가 없으면 차라리 눈치를 보지 마요!’라고 소리쳤다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너는 정말…. 눈치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뭐가 문젠데….”
“너 때문에 혼난 거라며.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가 정답 아냐?”
“내가 말한 게 그 뜻을 다 포함한 거야.”
“대체 어디가?”
나는 얘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대체로 미가 눈치껏 한다는 행동은 뭔가 어설펐다. ‘그럴 수도 있죠. 사장님이 좀 너무하시네요.’ 라는 말은 얘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신 혼나고 온 상사가 기죽은 미에게 말하기에 더 적합한 말인 것 같았다. 물론 미는 기죽지 않았지만 말이다.
미는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호탕하게 웃으며 맥주를 따랐다. 그런 얘를 보며 나도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가끔 미가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지만 확실히 미워할 수 없는 자신만의 매력이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천성이 느긋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은 아니지만.
화목한 가정의 외동딸 미가 자라온 환경에서는 눈치라는 게 자랄 틈이 없었다. 미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눈치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가끔씩 이런 시행착오가 생기곤 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미는 특유의 당당함과 여유로움으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언제든 도움을 요청하고 자신의 행동을 쉽게 바꿀 수 있는 유연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미는 내 말을 듣자마자 다짜고짜 상사에게 사과의 카톡을 보냈다.
“야, 퇴근하고 나서는 회사 사람들한테 연락하는 거 아냐. 왜 보내! 싫어하면 어떻게 해!”
“이런 건 바로바로 풀어야지. 야, 마셔, 마셔! 아 진짜, 왜 고기를 태우고 있어!”
“내가 안 태웠어. 난 가만히 있었는데 고기가 혼자 탔어.”
미는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 말도 맞긴 하네. 사장님! 여기 항정살 2인분 추가요!”
아무리 봐도 얘는 이상한 애다. 애초에 주문할 때는 안 물어보면서 먹고 싶다고 한 건 또 잊지 않고 시켜준다. 아무래도 미의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얘는 이렇게 매력이 많은데 굳이 눈치의 세계에서 발버둥 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러다 더 눈치 없어지면 나는 반드시 미를 때리게 될 테니까.
자기도 미안했다는 상사의 카톡을 받고 더 흥이 난 미는 신나게 술을 시켰다. 덕분에 우리는 영수증에서 10만원이라는 숫자를 봤다.
계산대에서 마음 약해진 미는 갑자기 더치페이를 주장했지만 나는 모른 척 했다. 아무래도 눈치의 세계에서 미가 되고 싶은 사람은 나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잘 먹었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