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괜찮지?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
순식간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무심코 던진 듯한 그 말에. 무엇보다 괜찮냐는 그 물음이 자신은 괜찮다는 말로 들려왔다. 헤어짐은 우리가 함께 겪은 일인데도 그는 벌써 완벽한 제3자 같았다.
그의 세계에서 나의 존재는 고작 이 정도였던 걸까. 아니면 나의 세계에서 그의 존재가 너무 컸던 걸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지만 사실 그에겐 내 대답이 어떻든 상관없는 것 같았다.
또 한차례의 연애가 끝난 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온전한 내 삶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그저 사랑이 끝난 것뿐인데 꾸역꾸역 밥을 먹는 스스로가 역겹게 느껴지고, 원래 혼자서도 잘했던 일들조차 순식간에 해야 할 의미를 잃어버렸다.
함께일 땐 늘 모자라던 시간이 갑자기 더디게 흘러갔고, 모든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떠다녔다.
어떤 일이 생기면 기어코 원인을 찾으려 애쓰다가, 끝내 모든 잘못이 전부 자신에게 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이 나다.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내가 잘했더라면’ 같은 끊임없는 자책과 후회로 스스로에게 가장 매몰찬 사람이 된다.
가장 좁은 곳, 방 한 칸에서도 겨우 몸만 누일 수 있는 자리까지 스스로를 몰아넣고야 만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사랑이 끝난 건데 사람이 끝난 것처럼 그렇게.
그냥 툭툭 털고 혼자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사람이 일으켜 줄 때까진 도저히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이불속에 틀어박힌 나를 일으킨 것은 그였다. 이런 내 사정은 꿈에도 모른 채 이젠 괜찮아 보인다며 속도 없는 소리를 한.
“이런 건 그냥 버려도 되는데.”
남은 짐을 돌려준다며 만나자던 그가 가지고 온 물건은 특별할 것도 없었다. 내가 쓰던 꼬리빗, 손거울, 머리끈. 없어져도 없어진 줄 모르는 그런 것들, 필요하면 아무 고민 없이 올리브영에 들어가서 얼마든지 살 것들을 남은 짐이라며 가져왔다.
“네 물건인데 함부로 버리기가 좀 그래서.”
“나도 버린 네가 이깟 물건 버리는 게 뭐가 어렵니.”
그가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도 입에서는 날카로운 말들이 흘러나왔다. 괜찮냐고 묻는 그의 말에 대신 답변이라도 하듯이.
난 아직도 네 한마디 한마디에 넘쳐흐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고, 사실은 내일도 괜찮지 않으면 어쩌지 싶어 밤에 잠드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혹시 술기운을 빌어 내게 연락이 올까 봐 새벽에도 뜬 눈으로 밤을 새운다고, 나는 아직도 너한테 궁금한 것들이 정말 많다고, 나 아직 안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날카로움으로 답변했다.
“미안해. 이젠 네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4년을 억지로 늘이고 늘여 만난 우리의 관계는 이미 1년 전부터 엉망진창이었다. 1년 전 어느 날 그는 이별의 전조증상도 없이 갑자기 내게 이별을 고했다. 심지어 그는 헤어짐을 말하면서도 나를 여전히 사랑한다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가 싶었는데 3일 뒤, 퇴근길 지하철에서 정확한 이유를 알았다. 그의 바람이 이유였다는 걸.
그걸 알면서도 서로가 술 취하면 찾아가고 찾아오고, 아프다면 찾아가고 찾아오고, 미친 듯이 싸웠다가 울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최악의 사람이 되고 있다는 걸 의식도 못한 채 이미 끝난 사이를 억지로 1년이나 더 늘이고 늘였다.
나는 이런 흐지부지한 관계를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고, 겨우 진짜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 독하게 마음먹고 얼굴을 보지 않은 게 한 달 전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깟 물건들을 돌려준다는 핑계를 대며 집 앞 카페로 나를 다시 불러냈고, 나는 바보같이 또 이 자리에 나오고 말았다. 혹시나 그가 해줄 어떤 말을 기대하면서. 하지만 여전히 그는 내게 미안하단 말 이외에는 해줄 말이 없단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었다.
“다신 보지 말자고 했잖아. 제발 끝내자, 우리.”
“잘 지내는지 걱정했어.”
“이제 네가 할 걱정 아냐.”
나는 그대로 일어나 카페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그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 자리에 나온 걸 또 후회하면서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에는 한창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오래전 그와 함께 이 벚꽃길을 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와 내가 원하는 목적지가 같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날이었다. 분명 그 지점쯤에서 돌아섰어야 했다. 잠깐이라도 숨을 고르고 멈추거나 돌아갈 기회는 분명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더 넓은 공터나 운동장을 기다렸다. 내가 조금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돌아설 수 있는 공간을.
내가 마음을 돌려세우는 게 급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누구라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틀린 사랑이라도, 어쨌든 사랑을 하고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때 돌아섰더라면, 이 벚꽃길을 걷는 게 덜 괴로웠을 것이다. 적어도 그땐 정말 벚꽃엔딩으로 잘 마무리할 수 있었겠지. 그렇게 나는 후회와 함께 이불속에서 꾸역꾸역 살아내는 사람으로 다시 돌아갔다. 꽤 오랜 시간을 그랬다.
23.2.27 월요일
* [오늘도, 사람!]은 뚜밍이가 진행하는 매일 에세이 연재 프로젝트로, 대체로 사람을 좋아하고 가끔 싫어했던 기억을 늘어놓습니다. 현재 시점의 이야기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니 읽는 데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