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07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은 많은 이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대화가 깊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마음속 품어둔 말들이 사람수만큼 있고, 그 말들은 언제든 입 밖에 나오고 싶어한다. 누군가의 말에 이어지는 맞장구는 어쩌면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 위한 예비동작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아마 익숙한 주제나 키워드가 나왔을 때, 놓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지기 때문일지도.
어떤 감정의 실타래가 풀리려는 순간,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무심히 툭 떠오르기도 한다. 물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면,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증발되듯, 대화도 금세 얕아지고 허공에 흩어져 버린다. 더 마음을 열어볼까 싶다가도, 분위기를 깨는 사람으로 보일까 망설이게 되고, 정말 하고 싶던 말들은 침잠한다. 사람이 많이 모여 조심스러워지는 자리엔 묘한 채움의 압박도 있다. 잠시 대화가 멈춰질 때면 찾아오는 어색한 기운을 몰아내듯, 하고 싶은 말이 없을 때도 질문이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누군가와 독대하는 자리에서도 작고 얕은 대화만 오가며 지나가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여러 사람이 함께 있어도 서로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순간에는 뜻밖의 깊이가 생기기도 한다. 결국 대화의 깊이는 사람 수보다는, 그 사이를 잇는 마음의 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깊지 않았던, 가벼운 자리들이 의미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가벼움 덕에 우리는 잠시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고 웃을 수 있었고, 먼지를 털어내듯 복잡한 일상을 잠깐 놓아두는 여유를 맛보기도 했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닌 그저 내 마음의 문제 때문이다. 그럴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안에 조금 더 머물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깊은 이야기를 건네기에는 구조적으로 불리한 조건이 많다. 대화의 흐름은 끊기기 쉬워지고, 말은 점점 ‘공통된 경험’이라는 안락한 울타리 안으로만 흘러가기 마련이다. 누구 하나의 이야기에 오래 머물러줄 수 없는 환경, 그저 함께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서, 가벼움이야말로 사람들이 모인 이유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음 한 구석 허전함을 안은 채 조용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에게 묻기도 한다. 그러는 나는 과연 그 자리에 얼마나 진심을 다해 앉아 있었는지.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온 것은 아닌지. 하지만 급하게 흘러가버리는 대화 속에서, 단순히, 그리고 짧게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마음 하나를 얹기에 녹록지 않은 자리였음은 분명하다. 애초에 깊은 허기를 품고 가서, 그저 달고 가벼운 디저트들로 속을 달래려 했던 내가 어리석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결이 비슷한 이들과 나누는 조용하고도 소중한 만남의 순간들을 떠올린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고 끝까지 들어주는 대답. 주제는 쉽게 바뀌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의 기분과 상황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으로 진행되는 대화. 복잡한 감정도 조심스럽게 살피며 함께 그 자리에 머무른다.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도 무겁게 흘러가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며 조용히 공감한다. 내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눈빛 앞에서, 나는 나 자신을 조금 더 믿을 수 있다. 그런 자리에는 공백을 채우기 위한 덧칠을 누군가가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말이 끊겨도 어색하지 않고, 그 정적은 오히려 서로를 더 깊이 느끼게 해준다. 포근한 온기에 잠긴다.
이런 자리와 어울리는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눈다. 누군가의 취향을 생각하며 고른 메뉴, 손수 덜어준 따뜻한 앞접시. 그렇게 많은 것을 먹었음에도 속이 전혀 불편하지 않다. 내 안의 맺힌 감정들이 해소되어 녹아내리고, 그 따뜻한 흐름 속에서 음식은 더 깊은 맛을 낸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느슨하다가도 촘촘하며, 가벼움과 깊음이 공존한다. 서로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는 여러 갈래로 이어져있다. 서로 기댈 수 있다. 그 내밀한 대화는 삶의 한가운데서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 그로인해 이후의 시간, 각자의 자리에서 너와 나는 홀로 살아갈 테지만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다.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는 것은, 마치 붓끝으로 한지 위에 마음을 조심스럽게 눌러 쓰는 일이다. 쉽게 날아가지 않도록, 감정이 가볍게 흩어지지 않도록. 그 사이에는 문진 같은 마음을 놓아두고 싶었다.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신뢰, 오래 머무는 침묵, 진심 어린 시선. 그런 것들이 대화의 자리를 단단히 눌러주고, 흘러간 말을 다시 되짚어볼 수 있는 무게가 되어준다. 말의 자리를 지켜주는 문진 아래, 그 말에 스며든 감정은 먹빛의 농담(濃淡)을 남긴다. 진심은 종이의 결을 따라 고요히 배어들고,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 자리에서 나누는 농담(弄談)을 참 좋아한다. 가벼운 웃음, 허물어지는 경계, 그 틈 사이로 스며드는 진심. 겉보기에 스쳐 지나가는 말 같아도, 그 안엔 서로를 향한 다정한 시선이 깃들어 있다. 먹빛 한 줄 글씨에 깊이를 더하듯, 그런 농담은 대화를 가볍게 띄우면서도 그 안에 농도를 심는다. 말의 무게는 가볍지만, 마음은 은은히 깊어져간다.
먹빛의 농담(濃淡)이 감정의 결을 스며들게 한다면, 별빛을 담은 농담(弄談)은 그 먹먹함 속에서 조용히 반짝인다. 마치 별이 어둠을 다 밀어내지 않고 그 속에서 조용히 빛나듯, 그런 농담은 우리에게 잠잠히 머무는 빛이 된다.
마음이 닿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은 종이처럼 포개져 버린다.
방금 웃음 지었던, 밝았던 하늘빛이 어느새 저녁의 어스름으로,
밤의 끝자락으로 이어져 접혀버린다.
나는 연묵(研墨)의 시간을 살아가고 싶다. 서두르지 않고, 하루를 정결히 갈아내듯 살아가는 것. 반듯한 종이처럼 나를 비워두고, 조심스레 마음을 풀어내기 위해 지금에 충실히 임하는 시간. 그렇게 나를 가다듬다 보면, 언젠가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마음 하나쯤은 꺼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렇게만 살 수는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먹을 고요히 갈고 싶었던 날에도, 마음은 자주 흐트러지고 생각은 불쑥 번져나가기 일쑤다.
그렇기에 그런 자신을 스스로 채근하기보다, 그 흐트러짐마저도 조용히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다듬어지지 않은 마음까지도 조용히 받아들여지는 자리를 기다린다. 다시금 말의 내용보다 그 안에 스며있는 숨결로 마음을 전하는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흐름을 놓쳐도 괜찮고, 말이 끊겨도 불편하지 않은. 그런 고요한 자리에서 사색이 흐르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묻고 또 천천히 답할 수 있는 시간. 마치 먹빛 위로 별빛이 스며드는 것처럼. 깊고도 가벼운, 조용하지만 선명한 시간을.
돌아보며 알게 된다.
그들과 함께 웃고 머물렀던 그 순간들이,
어느덧 내 삶의 한 시절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 대화는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조용히 스며들어, 나는 어느새
그들로 물들어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