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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알갱이

by StarCluster

정리라는 것이 가져다주는 개운함이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쾌적한 결과물이 시간을 꽤나 알차게 보냈다는 기분을 만든다. 예전 같았으면 방학이 마무리되는 즈음에 자꾸만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것저것 소비를 했을 테다. 이제는 정리 후 느껴지는 뿌듯함을 선사해 줄, 집 안의 정리를 기다리는 공간들을 이리저리 찾아보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한다. 그렇게 현관에 놓여있는 신발들과 바닥 타일의 문양들, 그리고 타일 사이의 줄눈에 끼어 있는, 서걱거리는 모래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신발장에 채워진 한가득의 신발들. 몇 해가 지나도 발은 커녕 손부터도 잘 가지 않는 그것들을 이제는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큰 타포린 백을 들고 와 여러 켤레를 눌러 담았다. 아내와 아이들의 신발까지, 계속 신을지 의사를 물어보았다. 남은 신발을 잘 털어 신발장에 차곡차곡 넣었다. 텅 빈 현관 바닥을 쓸어내며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모래나 흙 등의 미세한 가루들이 형형색색의 빛을 낸다. 이번 여름 동안 다녔던 여행지의 흙과 모래들이 딸려와 이 좁은 공간에 조금씩 모여 있겠지 싶었다.




희고 고운 모래들이 보였다. 동해 바다에 다녀왔었다. 첫째 아이가 다니는 미술학원과 옆 건물에 위치한 자동차 전시장의 협업으로 ‘내가 타고 싶은 꿈의 자동차’라는 미술 작품 전시회가 열렸었다. 그리고 지점장의 마음에 든 두 세 작품을 선정하여 그것을 그린 아이들의 가정에 그림 속 자동차를 빌려주는 이벤트에 당첨이 되었다.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일정을 잡고서 전시장에 들르니, 2층에 전시되어 있는 자동차를 바로 꺼내주셨다. 그렇게 첫째 아이 덕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오픈카를 몰고 바다로 떠났다. 그때 전시되어 있던 여러 수많은 작품들 중에, 마녀가 타고 다니는 빗자루에 해당 자동차 회사의 앰블럼만 붙였던 어떤 어린이의 유쾌한 그림도 생각하면서.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아이들의 웃음과 높고도 넓게 펼쳐지는 하늘, 그리고 바다에서 불어오던 바람.


아이들 신발 밑창에 박혀 있던 알갱이들이 보였다. 계곡 옆에 자리한 캠핑장에도 갔었다. 우리 곁을 날아다니던 여러 잠자리들. 오래 쫓아다니면서 놓치기를 반복하다가 기어이 한 마리를 잡아 통에 넣고 관찰했다. 잠깐 두었다가 이내 곧 다시 날려주었다. 장구벌레를 많이 많이 먹고 잘 자라달라고. 날아오르는 작은 곤충을 보면서도 움찔 놀라는 아이들의 쫑알거리는 말들과 웃음에 함께 하며 그 얼굴들을 바라본다. 자연을 목도하는 눈빛, 그리고 거기에 깃든 경이로움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부모에게 주어진 커다란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오래 기억나는 것은 차디찬 계곡 물이 작은 바위들에 부딪혀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면서 만들어내던 포말.


검은 모래들이 흩어져 있는 것도 보였다. 제주의 검은 모래해변에서 온 것이 분명한 모래. 해 질 녘, 넘실대는 바다의 주홍 빛깔에 매료되어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웅장함마저 느껴지는 정경 앞에서 일상에 두고 온 고민과 미루어 둔 대화들이 떠올랐다. 악한 사람과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구별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파도가 갉아낸 현무암의 미세한 조각들이 거친 세상에 부딪히며 내어놓는 우리의 대답과 닮아 있는 것 같다며. 언젠가 우리도 먼지가 되어 돌아갈 그날에 대해 생각하면서. 여전히 기억나는 것은 집에 돌아올 때까지 매일 아침 들렀던 카페와 산미 있는 드립커피의 향.




현관 정리를 하며 작은 모래 입자들로부터 반사되는 빛을 바라보다, 그 안에 비롯된 여름날의 이야기들을 빚어내본다. 시간을 아껴가며 써 내려간 글의 끝에 불리게 된 작가라는 호칭에도 물끄러미 시선이 머물러본다. 소중한 추억들로 엮어진 글들을 들여다본다.


그와 동시에 ‘현관’이라는 드나듦의 속성을 지닌 공간의 의미 또한 되짚어본다. 각자의 세상과 그들을 기다리는 집을 잇는 자리. 나의 세계로 기꺼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손님을 맞이하는 환대의 장소. 저마다의 꿈을 품고서 첫발을 내딛는 이곳.


생각해보면 작가란 그런 사람들일지 모르겠다. 세상의 흙먼지 속에서 보석 같은 기억을 발견해내는 사람. 자신에게 묻어난 경험과 깨달음의 입자들을 오래 들여다보고, 깊게 헤아려보며, 훌훌 털어 흘려보내는 사람들 말이다.


나 또한 그렇게 작가의 꿈을 품고 자리에 앉았다.

흩어지려는 여름의 알갱이들을 소중히 그러모았다.

하나의 글이 된 이야기를 여기,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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