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 한 점에 이르기까지

231116

by StarCluster

반복이라는 것을 자주 생각한다. 어떤 반복은 사람을 무뎌지게 하지만 어떤 반복은 사람을 날카롭게 만든다. 같은 행위를 매일 해도 그것에 쏟는 마음이 다르다면, 그 끝의 모양 또한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오래도록 갈고 닦은 집중력이 응축된 감각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너무나 좋아한다. 그 벅참은 표면에 드러나는 찬란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 순간에 다다르기까지의 수많은 노력이 응집되어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수없이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연습하고, 더 나은 방식으로 수행하고자 복기하며, 인고의 긴 터널을 치열하게, 또 꾸준히 디뎌온 이들이 써 내려간 삶의 문장들. 그리고 나는 그 행간을 천천히 헤아려본다.


그들이 보여주는, 늘 하던 대로의 '내 것'을 해내는 시간. 그것을 지켜보는 일은 또 하나의 동기부여이자 도전이 된다. 그 장면은 숨 졸이며 관람하는 스포츠일 때도 있고, 웅장하고 세밀한 예술일 때도 있으며, 오늘 같이 한데 모여 보는 시험의 순간일 때도 있다.




수험생들은 반복 속에서 무르익은 사고의 흐름으로, 꾸준히 걸어온 방식으로 주어진 문제에 응한다. 긴장에 휩싸인 무대에서 그들은 그 모든 반복의 시간을 한 점(點)의 순간에 풀어낸다.


수없이 되풀이해 온 이해, 너무나 많이 틀려보고 또 바꿔본 방식들, 기어코 자리 잡은 한 줄의 통찰. 그리고 조용히, 오래도록 다듬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온 어떤 태도를 바라본다.


분명 그것은 단순한 반복으로 닳아버린 무뎌진 결이 아닌, 섬세하게 벼려낸 예리한 날결의 마감이다. 그 예리함으로 찍어내는 한 점을 목도한다.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감각으로 완성되는 점 하나.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기 위해 묵묵히 찍어낸 마침표.


그 하나의 점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나온 시간들을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가다듬고 다독여 온 그들이 평소처럼, 하던대로, 별 일 없이 잘 해낼 수 있도록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돕는 자리. 그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관성처럼, 습관처럼 무언가를 무심코 반복하다가

무뎌진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존재를 돌보는 일을 반복하는 일상을 그저 단순함이라고만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마음을 담아 지키고, 길러내고, 가르치는 이가 지니는 속성에 대해서.


그것은 어쩌면 숫돌 같은 삶.


스스로는 조금씩 닳아가면서도 대신 상대의 내면을 단단하게 벼려주는 사람. 수많은 날결이 스쳐 지나며 남긴 흔적을 품고, 그 닿음 속에서 타인의 삶을 더 또렷하게 드러나게 해주는 존재. 곁을 내어주고, 중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댈 수 있는 어깨. 자신이 돋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더욱 빛날 수 있도록 돕는 손길을 생각했다.


이들이 보여주는 반복은 그저 단순한 습관이 아니다. 숫돌이 그러하듯 스스로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고단함을 견디면서도 끝내 더 정교한 형태를 완성해내는 일이다.


당장 예리하지 않더라도,

매번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늘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사랑.


거기에 깃들어 있는,

근사한 아름다움을 생각해본다.




삶을 찌르는 듯한 첨예하고 찬란한 문장도,

곁에 오래 머무는 질박하고 둔중한 문장도,

그저 쉽게 떠올라 쓰여졌을리 없다.


지나간 시간에 진득하게 스며든 사람의 마음과 지새워낸 말들 사이로 남겨진 한 사람의 결.

그것이 점이 되고, 선이 되고,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비로소 글이 되었다.


아무래도 인생은 일필휘지(一筆揮之)로 흘러갈 수만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정제된 삶은, 하루하루의 노력이 집약된 눌러쓴 글에 더 가깝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써 내려간 글의 끝, 마지막에 찍힌 하나의 점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다정한 발문이 되어줄 수 있기를 또한 바랐다.




답안지에 적는 필적 확인 문구를 전국의 수험생 모두가 동시에 자필로 쓴다.


수능 당일, 전국의 수험생들이 4~5교시 동안 같은 문구를 반복해 쓰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백만 번 이상 똑같은 문장이 자필로 적히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자니 오묘한 기분도 들었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라는 문구를 쓰는 수험생들의 마음은 각자 다르겠지만, 하나의 마침표를 찍은 그들이 너른 여유를 품고, 자신의 걸음으로 새로운 문단의 첫 줄을 써 내려가기를 바랐다.




ⓒ 2012. StarCluster





keyword
이전 27화문장의 화신(化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