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떼루아를 품은 글

by StarCluster

떼루아를 품은 글

250516


글을 써보겠다고 여기, 브런치스토리라는 플랫폼에 발을 들였지만, 오히려 글을 작성하는 시간보다 다른 작가들의 글을 읽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는 스스로를 돌아보곤 한다.


이렇게나 다채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 곳에 모여 글을 쓴다. 자신의 조각을 선뜻 내어놓는다.


비록 많지는 않지만 나도 글들을 발행해 보았기에 느껴지는 그들과의 작은 공감대도 있다. 정성을 들여 마지막까지 몇 번을 거듭해 다시 보며, 다듬고 또 다듬은 글에 키워드를 붙이고, 발행 버튼을 누르는 작가의 손끝에 담긴 두근거림도 상상해본다.


그렇게 글들 사이를 항해하다 보면, 문득 멋진 문장들 사이에 머물게 되고, 삶의 태도나 통찰을 배우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마음에 드는 곡의 아티스트를 찾아 음악앨범의 수록곡을 하나하나 들어보듯이, 결이 맞는 글을 발견하면, 작가의 계정에 들러 한 편 한 편을 찬찬히 읽는 경우도 있다.


그들이 지내왔을 시간과 경험이 녹아있는 글을 읽다 보면, 문장 사이로 은은하게 향이 스며들어 있다고 느낀다. 그의 생각을 밀도 있게 품어낸 글에서 느껴지는 여운이 마음에 뭉근히 남는다. 그런 글을 읽으며 떼루아가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땅이 품은 고유한 환경이 그 품에서 자라난 작물에 저마다의 맛과 향을 입힌다. 햇살의 기울기, 비와 바람의 숨결, 흙의 질감이 한 송이, 한 알 속에 스며든다. 이렇듯 자연이 빚어낸 풍경이 그대로 맛이 되고 향이 되는 것을 우리는 '떼루아(Terroir)'라 부른다.


같은 씨앗이라도 각각의 다른 환경에서 각자 다른 이야기를 품고 피어난다. 때문에 동일한 작물이라 해도, 누가 어디서 키웠는지의 가치가 중요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글도 마찬가지다. 세상사 비슷한 주제로 쓰더라도,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인지에 따라 글의 향이 달라진다. 글을 써 온 수많은 선배님들이 말해오셨듯, 글을 읽는 것에 우선하여 사람과 상황을 만나고 맥락을 해석하는 경험이 더 소중하다고 했던 것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다.


생애의 테, 감정의 온도,

시간과 장소를 살아낸 사람과,

그로부터 숙성된 생각.


그가 쓴, 겉으로 드러나 독자에게 닿게 된 문장들은, 여지껏 침묵의 무게를 져오면서 마침내 여기 이르러 글을 쓰고자 한 이유 또한 함께 담고 있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깊게 깊게 침잠하며 깨달음의 조각을 갖고 뭍으로 올라온 이의 글은 분명 떼루아가 배어 있다. 떼루아가 느껴지는 글이란, 문장의 이면에 존재하는 글쓴이를 함께 읽게 되는 글이다.




‘나’라는 사람의 토양에 겹겹이 쌓여가는 것들을,

시간과 상황과 사람과 맥락들을,

거기서 비롯된 수많은 감정들을 헤아려본다.


하루의 끝 현관문을 여는 포근함

막 까놓은 감귤향을 맡는 상큼함

합격 문자를 받았을 때의 짜릿함

쏟아지는 비를 홀로 맞는 애절함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는 먹먹함


오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모욕의 순간

온 세상이 꺼지는 것 같은 상실의 순간

벼랑 끝에 다다른 것 같은 절박한 순간

진심이 결국 닿은 것 같은 안도의 순간

큰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후련한 순간


너라는 경이로움을 느끼며,

그대로 숨이 멎을 것 같은 설렘의 순간까지


모두 나열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삶에 어지러이 범람해온다.

휴경(休耕)의 회복 속에 비옥한 퇴적물들이 쌓이고 다져진다.

삶이 스며든 토양 위에서 한 줄의 문장이 묵묵히 싹을 틔운다.


그렇게 나를 보는 마음으로

나는 그를, 그의 작물을 읽는다.


그는 분명 진심을 담은 글을 짓고 싶어 이곳에 도달한 이


그의 안녕을 기원하며,

오늘도 그가 빚어낸 作物의 향을 맡는다.



ⓒ 2019. StarCluster




keyword
이전 28화그 한 점에 이르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