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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의 언어, 말의 유산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by StarCluster

늘 수업이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몰입하고,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한 시간 동안의 만남이 작은 쉼표가 되어 그들의 삶의 한 부분이 되길 소망하곤 한다. 하지만 어떤 수업은 그저 무탈하게 끝나기만을 바라기도 한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고, 평소 가볍게 던지던 농담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사회적 약자를 주제로 수업하고 배우는 단원, 그 시간만 되면 항상 조심스러워진다.


사회적 약자는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지, 뉴스나 실생활에서 차별을 당한 사례는 무엇이 있는지, 우리도 모르게 사회적 약자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사회적 약자라면 필요한 실질적 도움이 무엇인지 등을 다루는 수업.


"사람은 누구나 아플 수도 있고, 실직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을 겪어 왔고, 또 반드시 늙게 돼요. 그래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거예요."


수업을 시작하기 전, 나는 이런 말을 아이들에게 조심스레 건넨다. 사회적 약자는 우리 각자와 동떨어진 특정한 소수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떤 순간 경험하게 될 수 있는 것임을 먼저 언급해두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바라볼 때, 그 사람이 놓인 상황이나 구조를 함께 들여다보자고 이야기한다. 아이들 중 누구라도 혹여나 수치심을 느끼는 일이 없도록, 수업을 미리 준비하고 진행하고자 노력한다.


그렇지만 수업을 마치고 나면 한 명, 또 한 명을 붙잡고 묻고 싶어진다. 혹시 오늘 수업에서 마음을 다친 순간은 없었는지,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말 한마디가 어떤 아물지 못한 상처를 긁어놓는 일은 없었는지에 대해서. 존재를 다루는 이야기일수록 말의 결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다루는 수업은 개인의 생생한 아픔과 현실 그 자체를 건드릴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때로는 내가 던진 질문의 의도와 다르게, 곁가지로 뻗어나간 말이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어떤 사실은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표현되는 그 자체만으로도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다. 말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감정과 태도까지 함께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실이라며 내뱉은 말들 속에 무심히 섞여든 뉘앙스, 행간에 내포된 판단은 때로 그 어떤 거친 욕설보다 더 깊은 모욕의 상처를 남긴다. 그렇게 사람들을 괴롭히는 고약한 문장이 생성된다. 대체로 보복하지 못할 것 같은, 약한 존재를 겨냥해 쉽게 남발되는 말. '농담'이라는 포장으로,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멸시와 혐오의 표현이 일상처럼 오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예전에 학교에서 '바른 말을 사용하는 학생'을 선정하고 시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반에서 몇몇 학생들이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지적장애 아이를 가리키며 "쟤가 받으면 되겠네, 말도 잘 못 하니까 욕도 못 하잖아" 라고 말했다는 것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랐다. 무엇보다 그 말을 들은 주변 친구들 누구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지나쳤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 아이는 어떤 감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을까.


아이들은 예전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더 다양한 말에 노출된다. 자신이 던지는 말이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를 채 다 알기도 전에 날카로운 표현들을 익히고 사용한다. 대화 속 욕설은 이미 자연스러운 일상이고, 약자를 모멸하는 말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온다. 서스럼없이 뱉는 그런 말로 인해 때로는 활기차던 수업을 멈춰야 할 때가 있다. 조심스레 쌓아 놓은 수업의 흐름을 긴 한숨 내쉬며 잠깐 끊어야겠다는 판단과 함께, 결코 쉬이 흘려보낼 수 없는 그 말에 대해 반드시 다루어야만 할 때가 있다. 그 표현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된 말인지,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어떤 고통을 유발하는지를 아이들과 함께 짚어본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면 아이들은 종종 말문을 잇지 못한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기도 하고, 그런 표현을 자주 사용하던 아이들을 쳐다보기도 한다. 그 아이들은 손사레를 치며 "그런 뜻으로 사용한 게 아니었어요"라고 항변한다. 내심 그렇게 말해 주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자신이 내뱉은 말들과 지난 날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 그 낯설고 불편한 잠깐의 침묵 속에서 아이들은 ‘말의 책임’을 배우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언어란 무엇인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말들을 품고 또 내려놓는 일인지를.


문득 최은영 작가의 소설 '밝은 밤'에서 친구 지우가 지영의 상황에 공감하며, 같이 화를 내면서 전남편을 '개새끼'라고 욕하는 장면이 떠올라 수업 때 이야기해 준 적도 있었다.


"개가 왜 욕이 됐을까." 나는 지우에게 물었다. 지우는 개새끼라는 말은 개의 새끼라는 뜻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개는 가짜라는 뜻이라고. 그러니까 '정상 가족'이라는 테두리 밖의 가짜 자식을 뜻하는 멸칭이라고 했다. 지우는 거기까지 설명하더니 나쁜 말이네. 라고 말하고는 앞으로는 그 단어를 쓰지 않을거라고 했다. 그러더니 개새끼, 미친놈, 씨발놈 어느 것 하나 쓸 만한 말이 없다면서. 인간은 왜 이렇게 치졸하냐고, 왜 꼭 약한 사람을 짓밟는 식으로 밖에 욕을 못 만드느냐고 했다.

"참신한 욕이 필요해. 분이 풀리는 욕이 필요해."

최은영, 『밝은 밤』, 13.


우리는 종종 욕설을 그저 분노의 분출쯤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선다. 그 안에는 말하는 이의 감정뿐 아니라, 사회적 맥락이 함께 얽혀 있다. 특히 혐오나 차별의 흐름에서 발생한 욕설은 화가 났다는 사실 이상을 담고 있다. 그것은 어떤 존재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특정 정체성을 조롱하며, 사회 안에서의 위계와 서열을 암묵적으로 각인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말은 그렇게 혐오의 표현이 되고, 그것이 모여 구조적 폭력을 이룬다. 그러한 말의 방향이 향하는 곳에는 분명 누군가의 삶이 있다.


분노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다. 누구나 느낄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 잘 느껴야 한다. 그 뜨거움만큼이나 그것을 표현하는 태도는 섬세해야 한다. 감정이란 것이 거칠게 흘러나올 때,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를 덮쳐버릴 수 있다. 마치 아무렇게나 내다 버린 불씨 하나가 온 산을 태우듯, 조심성 없이 쏟아낸 분노의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깊은 화상을 남길 수도 있다. 분노를 다루는 과정과,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 남을 흔적을 우리는 늘 상상하고 행동해야 한다. 마냥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말로 풀어낼지 함께 배워가는 일이 중요하다. 파괴의 잔재만을 남기는 혐오와 멸시에서 벗어난 분노의 언어가 필요하다.


교실에서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그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어떤 감정도 틀리다고 할 수 없지만, 그 감정을 말로 풀어내는 방식엔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군가를 깎아내리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내 마음을 말할 수 있는 새로운 말의 형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것을 배우고, 시도하며, 섬세한 결을 품은 대화의 자리를 만드는 일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교실 안에서의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를 넘어서, 우리가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워가는 하나의 관점이 된다.


학생들과 다짐의 말, 결의에 찬 눈빛을 나누며 수업을 마무리한다. 아이들이 삶을 살아가며 지닐 귀중한 태도를 한 번쯤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말은 금세 흘러가지만, 그 말이 담고 있던 태도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고 믿는다.


수업이 끝나고, 스스로에게 조용히 묻는다. 우리 세대는 혐오를 남길 것인가, 아니면 공감을 남길 것인가. 그것은 결국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어떤 말에 더욱 귀 기울이고, 어떤 말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게 이 사회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아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곧 인류가 이어갈 말의 유산이 된다. 그 소중한 것을 물려주는 일은 가정 및 사회와 더불어, 지금 이 교실에서도 함께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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