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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식

뿌리 깊은 나무

by StarCluster

종업식, 그리고 오롯이 담임에게 주어진 50분.

'우리반'이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마지막 시간.


학급 회장, 부회장, 칠판 관리, 문단속, 출석부 관리, 분리수거, 멀티미디어 기기 관리, 환기 및 청소 등등. 이런저런 역할로 반을 함께 꾸려가며 수고한 아이들을 격려해주었다. 먼저 나서서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을 찾기가 어려워진 시대이기에, 받는 혜택과 별개로 그런 태도 자체를 많이 칭찬하며 높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명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급에서 정말 귀한 역할을 해 준 아이들도 있다. 겉도는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 준 학생. 수업 때 적당한 질문과 가벼운 농담으로 수업의 흐름을 살려주는 학생. 갈등 상황에서 중재자가 되어 준 학생. 내가 놓친 부분을 조심스레 짚어주는 학생. 다 나열하지 못하는 여러 순간과 상황들에 학급을 잘 굴러가게 한 숨은 공로자들이 많다.


성실함과 배려, 유머 등의 성정을 두루 갖춘 아이들이 반에 있다는 것은 담임 교사로서 큰 행운이자 진심으로 감사한 일이다. 담임 교사의 수업이 들어 있지 않은 요일도 많기에, 온종일 한 학급에서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에게는 그 마음이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을 것이라는 점도 잊지 않고 이야기했다.


1년 동안 찍어 간직해 둔 사진들로 교실 안팎에서 함께 한 사계절을 돌아보았다. 선명한 사건들이 많았음에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전날 밤, 고요한 집에서 '달별로 몇 장씩만 추리자'고 마음 먹고 컴퓨터 앞에 홀로 앉았지만 쉽지 않았다. 사진 하나하나에 담긴 추억들, 웃음들로 인해 단순한 작업임에도 시간이 꽤 걸리고 말았다.


화면에 크게 띄운 사진들이 하나씩 등장할 때마다 환호성이 여러 감정의 빛깔을 담아 번져 나왔다. 나 또한 바라보는 한 명 한 명의 얼굴과 이름에 한 해 동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마다 각자의 언어와 감상으로 그 때 당시의 시간을 추억했다. '같은 반'이라는 이름으로 매일을 모이는 이런 인연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후련함보다 아쉬움이 더 크게 밀려오는 반 아이들과의 작별의 시간이 기어코 찾아오고야 말았다.


이제 성적 통지표만 나눠주면 마무리되는 오늘의 일정.

이에 앞서, 며칠 동안 고민하며 준비했던 마지막 종례를 했다.




'우리가 경쟁해야 할 대상은 타인이 아닌 어제의 나.'


저는 이 말을 들은 이후, 지금까지 쭉 마음에 새기며 살아왔어요. 어때요— 여러분은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나요? 이 다짐은 스스로를 성장하게 하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주곤 했어요. 그런데 때로는 조급함을 낳기도 했어요. 매일을 열심히 살며, 무언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저를 움츠러들게 만들기도 했어요. 손에 무엇도 잡히지 않은 조급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했고요.


살다보면 당장 눈에 띄는 결과가 없는 것 같아 마음이 힘들 때가 있어요. '성장하는 내 모습은 도대체 언제 볼 수 있는 걸까?' 싶어 더디게만 느껴지는 그런 기다림이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성과로만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어요. 내적인 가치나 충실함을 쌓아가는 시간, 그러니까 '내실(內實)을 다지는 시간'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함께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화처럼 누군가의 노력하는 장면을 빨리 감아, 휙 넘어가면서 '짠-! 그는 이렇게 성장했답니다.'와 같은 생략이나 축약이 실제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누군가의 빛나는 성공 아래, 그의 불안과 슬픔, 눈물과 고통으로 지새운 낮과 밤들이 그를 단단하게 쌓아 올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간과하곤 합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깊게 뿌리 내린 나무를 떠올리곤 했어요. 세찬 바람에도 쉽게 꺾이거나 흔들리지 않는 나무를요. 당장의 성과나 성장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혹독한 실패를 겪더라도 괜찮아요. 우리가 배워온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면,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오늘 하루 또 한 뼘 깊이만큼의 뿌리를 더 내린 거예요. 그 뿌리는 지식일 수도, 가치관일 수도 있고, 혹은 좋아하는 일이거나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가 될 수도 있어요. 어쩌면 쉽게 이룬 것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지만, 오랜 시간 깊고 단단하게 내린 뿌리는 우리가 더 높이 자라나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튼튼한 기반이 되어줄거에요.


그러니 치열했던 하루의 끝에 문득 지치고 힘든 마음이 든다면, 이 이야기를 한 번쯤 떠올려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 하루를 여러분은 이미 충분히 잘 살아낸 것이니까요. 여러분이 스스로를 조금 더 믿어주고 다독여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때는 분명히 오고 있습니다.


화면에 띄워둔, 우리가 4월에 같이 필사했던 박노해 시인의 시, '너의 때가 온다.'를 함께 읽어보아요.

이제 종업식을 마무리할게요. 1년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담임이어서 참 행복했습니다. :)






ⓒ 2024. StarClu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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