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책방에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준수가 다시 왔다.
문을 여는 순간, 바람을 타고 그 시원한 향이 들어왔다.
"어서 와요, 서 준수 학생."
그의 한 걸음 뒤로 회색 고양이가 따라 들어왔다.
“짝꿍도 왔네요. 그새 많이 컸네요.”
“얘 이름은 슈뢰딩거예요.”
“슈뢰딩거?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당히 지적인 이름이네요.”
.
이름 때문일까? 녀석의 호박색 눈은 마치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에 발을 하나씩 걸치고 있는 것처럼 오묘했다.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와 같은 디자인이에요. 너무 예쁘죠?"
두손으로 책을 받아 든 준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책을 건네줄 수 있었다. 책방 주인 자격시험이라도 통과한 기분이었다.
* * *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토성 책방.
지난여름 뇌출혈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서른 해 동안 지켜온 책방이었다. 부동산에 내놓기 전 마지막으로 둘러보려고 왔었다.
요즘 누가 동네 책방에서 책을 사는가?
아버지의 인생은 책방에 있었고, 내 인생은 비행기 시간표와 실적표 사이에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지붕까지 꽉 찬 서고의 책들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아, 내게도 책과 대화하던 시절이 있었지.
안쪽 창고 문을 열자 먼지 냄새와 함께 기억이 밀려왔다. 엄마의 붉은 벨벳 의자. 아버지가 매일 앉아 계시던 그 자리. 그 옆에 낡은 햄 무선장비가 있었다.
아버지는 이걸로 뭘 하셨던 걸까?
손을 뻗어 먼지를 닦아냈다. 차가운 금속이 손끝에 닿는 순간,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아버지는 책방에서 어릴 적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났다고 하셨다.
"책 속에서 엄마가 말을 걸어오더라."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책방에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떠난 사람들도 여기선 여전히 살아 있다.
그날,
책장에 아롱거리는 햇살 속에 섰을 때,
알았다.
나도 여길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걸…
내가 있을 곳은 바로 여기라는 걸.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가 사표를 내자 경쟁사로 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표는 화를 냈다가, 가업을 잇겠다고 하자 곧 후회할 거라며 설득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토성책방.
촌스러웠지만 30년 역사를 지울 순 없었다. 책방 이름은 그대로 두는 대신 간판에 고리가 있는 별 토성을 넣었다.
책방은 낡았지만 층고가 높았고,
초록 잔디가 덮인 토성이 내다보이는 창이 있었다. 잘만 고치면 분위기로 사람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참고서와 베스트셀러를 치웠다.
대신 내가 좋아했던 책들만 남겼다.
직접 읽은 책만 팔기로 했다.
12월 첫째 주에 다시 문을 열었다.
이달의 책, 금주의 책, 오늘의 책.
별도 판매대를 만들어 부지런히 책을 추천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만으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책을 사들고 나가게 하기가 벅찼다.
“참고서는 없어요?”
고개를 저으면, 손님은 잠시 서가를 훑다 그대로 나갔다.
부푼 꿈과 달리, 나는 하루 종일 창밖을 바라보며 토성 위로 휘몰아치는 바람만 세고 있었다.
햄 통신으로 책을 알리면 어떨까?
황당한 생각이 스친 것은 종일 손님이 한 명도 없었던 날 밤이었다. 이러다 일 년은커녕 봄이 오기도 전에 문 닫는 건 아닌지 걱정에 뭐든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누군 태어날 때부터 책방 주인인가?
노력하다 보면 단골도 생기고 그런 거지.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할 수 있는 책을 선정했다.
어린 왕자.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사주셨던 책이었다. 그림책이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두꺼운 책이라 매일 조금씩 읽어 주셨다.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읽어도 좋은 책이다.
CQ CQ 여기는 토성책방
처음엔 햄 마이크에 대고 떠드는 게 어색했다. 하지만 하다 보니, 마음이 편했다. 혼자 신이 나서 책 소개를 했다.
그저 어디든,
누구에게라도 가 닿기를 바라는.
이렇게 멋진 책을 발견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 * *
커피 손님들의 두런두런 말소리는 나른하게 듣기 좋았다. 창밖 놀이터를 둘러싼 벚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렸다. 바람이 불면 일찍 핀 꽃송이가 하늘하늘 떨어졌다.
준수는 지난번 앉았던 창턱 아래 자리를 잡고 책을 펼치더니 꼼짝도 안 했다.
“언제 읽어도 재미있죠?”
내가 말을 걸었다.
“이 책을 쓴 아저씨는 어디 있나요?”
뭐래?라고 생각하면서도 손님 장단에 맞춰주고 싶었다.
“생텍쥐페리요? 2차 대전 당시 정찰비행을 떠났는데, 아마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죠?”
“그럼 아직도 하늘에서 정찰 중인가요?”
이 아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어린 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는 죽었다. 누구나 아는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은 건, 진짜 몰라서 묻는 게 아닐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눈앞 소년은 그가 정말 아직도 하늘에 떠 있을 거라 믿는다는 듯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슈뢰딩거도 놀란 듯 야옹 하고 울었다.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눈앞에 청록빛 커튼 같은 것이 펄럭였다.
“눈을 떠봐.”
파란 하늘이 눈을 가득 채웠다.
아까 그 소년, 준수가 보고 있었다.
사방이 모래밭. 뜨거운 열기도 느껴지는 사막이었다.
"우린 이제 쏘(Saut)를 할 수 있어."
도약.
처음 듣는 단어인데, 내가 뜻을 알고 있다.
"나랑 같이 찾아봐!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쓴 파일럿 아저씨."
"생텍쥐페리를? 너 설마......"
“맞아. 나야 나. 책에 나오는 주인공. 나랑 같이 아저씨를 만나러 가자.”
“네가 어린 왕자? 말도 안 돼.”
내가 헛웃음을 치는데도 준수는 상관없다는 듯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슈뢰딩거가 낮게 울었다. 사막의 뜨거운 모래 위인데도 녀석의 회색 털은 서늘한 책방의 공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녀석이 꼬리를 한 번 휘두르자,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사막의 지평선이 마치 책장을 넘기듯 한 번 출렁였다.
“그럼, 여기가 사하라 사막인 거야?”
대답 없이 걷기만 하는 그를 따라 걸었다. 발이 푹푹 빠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모래언덕 아래 움푹 팬 곳에서 멈추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분명 여기쯤인데.”
아무리 봐도 똑같은 풍경.
모래뿐인 그곳에서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가 반짝거리는 금속 조각을 주머니에 넣는 장면을 본 듯도 했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분명 꿈일 텐데도 강렬한 태양 아래, 목이 말랐다.
모래언덕을 넘자 우물이 나타났다.
책에서 본 바로 그 우물.
준수가 도르래를 당겨 물을 길어 올렸다.
햇살이 일렁이는 물을 마시니,
어떤 술이나 음료보다 달고 시원했다.
우물 옆 돌담 그늘에 기대어 쉬었다.
태양 아래 그의 볼이 빨개졌다.
또 그 푸르고 투명한 향이 건너왔다.
"책이 나온 건 어떻게 알았어?"
"네가 이야기해 줬잖아.
아저씨가 사막에서 나를 만난 후 소설을 쓴 거라고."
"그럼 내 햄 통신을 들은 거야?"
"응. 난 아저씨를 다시 만나고 싶어."
"진짜 들었다는 말이지! 그래서 날 만나러 온 거고."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렇다니까. 너는 모르는 게 없잖아. 그러니 네가 날 도와줘.”
“내가? 하지만 생텍쥐페리는……”
아무리 꿈이라도 어린 왕자에게 생텍쥐페리의 죽음을 전하는 역할은 싫었다.
“그가 살아있다고 해도 벌써 130살이야. 인간은 그렇게 오래 살 수 없어.”
"아저씨는 어딘가에 분명 살아 있을 거야.
부탁이야. 나랑 같이 찾으러 가자."
그가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쳤다.
간절한 눈빛.
어! 내가 아는 눈빛인데… 어디서 보았더라.
나는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다.
“약속한 거다.”
그가 다짐받았다.
"약속할게! 그런데 너 왜 어른한테 꼬박꼬박 반말이야?"
"아, 미안. 그런데 누나 이름은 뭐야?"
또 누나라고 부른다. 스스럼없는 태도에 나는 웃고 말았다. 나는 회사에서 만든 영어 이름을 알려주었다.
"스텔라. 그래, 스텔라로 불러."
"빛나는 누나랑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역시 말솜씨가 좋았다.
어느덧 밤으로 변한 사막 하늘.
빼곡한 별들이 쏟아졌다.
이 아이와 함께라면
생텍쥐페리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이 책으로 할게요."
계산하려는 손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벨벳 의자에 앉은 채 두리번거렸다.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시계를 보니 채 일 분도 안 지났다.
창가의 준수는 비쳐 드는 햇살에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채 책에 빠져 있었다.
그때, 카운터 위에 웅크리고 있던 슈뢰딩거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녀석과 눈이 마주친 순간, 고양이가 나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녀석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
며칠 후 책방 문을 닫을 즈음, 도현이 찾아왔다. 그가 들어서자 조용하던 책방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도현은 늘 그랬다. 내가 뭔가 매몰될 때 그는 역동적인 전략으로 판을 흔들었다.
"책이 진짜 많네. 설마 다 읽은 건 아니지? 오, 커피까지 직접 내리고."
무엇에라도 감탄할 준비가 된 사람처럼.
그를 보니 회사가 그리워졌다.
그는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겠다며 책을 다섯 권이나 샀다.
"왜 갑자기 사표를 낸 거야."
술을 마시던 도현이 물었다.
"나 원래 책 좋아하잖아."
"돈은 벌고 있어?"
"뭐든 일 년은 돌려봐야지. 삼십 년 역사를 자랑하는 가업이라고."
"책방이 네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어? 넌 지고는 못 사는 승부사였잖아."
머뭇거렸다.
"책방에서 승부를 걸면 되지."
"정말? 넌 원래 세상을 누비는 걸 좋아했잖아."
며칠 전 사하라 사막 꿈이 떠올랐다. 어린 왕자와의 약속. 백일몽일 뿐이었다. 그래도 큰소리쳤다.
"혹시 알아? 책방에서도 신나는 모험을 하게 될지."
"넌 여전하구나. 철저한 승부사 같다가도 어느새 낭만적인 몽상가라니까."
도현이 웃었다.
오랜만 티키타카는 즐거웠다. 회사 소식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사람들과 어울리던 직장생활도 그리워졌다. 불과 몇 달 전인데 그 시절이 아주 먼 옛날 같았다. 우리는 술을 꽤 마셨고 자정이 넘어 나왔다. 나란히 택시를 기다렸다.
“네 빈자리가 너무 커.”
그가 툭 말했다.
놀라 돌아보는데, 그는 짐짓 택시가 오는지 보고만 있었다.
“그럴 리가. 회사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잖아.”
마침 빈 택시가 우리 앞에 섰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보고 싶지 않았냐고?”
그가 홱 돌아서며 물었다. 얼핏 그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니... 내가 흔들린 건가?
우리는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택시 운전사가 차를 탈 건지 묻는 듯 경적을 빵빵 울렸다.
나는 손을 들어 짧게 인사했다. 택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밤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동녘에서 희미한 빛이 터올 때까지 잘 수가 없었다. 두고 온 옛 꿈이 그리워서인지, 앞날이 걱정되어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다음날은 서점 쉬는 날이었다. 장기전에 지치지 않으려면 복지도 스스로 챙겨야 했다. 소중한 휴일이었지만 딱히 가야 할 곳도, 만날 사람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 외로움으로 시작해서 우울함으로 번졌다.
이런 때일수록 움직여야 한다. 밀린 책이나 읽어야겠다 싶었다. 책방을 열면 책을 많이 읽게 될 줄 알았는데 이런저런 일들로 시간에 쫓겼고 읽을 책은 항상 쌓여 있었다.
그래도 휴일인데, 화창한 봄날에 어울리는 크림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향수도 뿌리고 상아색 구두까지 신자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가만히 책방에 들어갔다. 블라인드를 내려놓은 채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을 틀었다. 거리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있자니 휴일 느낌이 났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즐기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표지판도 안 보나? 휴일이라고 쓰여 있는데.
하지만 두드림은 계속됐다.
규칙적이고 집요하게.
마치 암호처럼.
혹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