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탐사일지 23화
갈릴레오의 흔적은 파도바 천문대 박물관 (Museo La Specola)에도 남아 있다.
한때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겠지만, 지금은 높이 오십 미터 남짓의 오래된 석조 건물이다.
갈릴레오는 여기서 목성의 위성 네 개를 발견했다.
목성에 가까운 순서대로 이오(Io), 유로파(Europa), 가니메데(Ganymede), 칼리스토(Callisto).
이 중 유로파는 얼음으로 덮여 있으며, 지하에 액체 바다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NASA가 제작한 기발한 여행 포스터는 미래 탐험가들이 유로파의 얼음 지각 아래 바다에서 살고 일하는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 사진 출처 : 나사 홈페이지
지난 2024년 10월,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지 조사할 무인 탐사선 '유로파 클리퍼'가 지구를 떠나 긴 여정을 시작했다. 2030년 도착해 외계 생명체 존재를 정밀 탐사할 예정이다. 유로파 클리퍼가 발견의 기쁨을 전해줄지 기대해 본다.
붉은 노을이 내려앉는 해 거름 천문대 꼭대기에서 바라본 풍경은 아름다웠다. 이른 샛별이 몇 개 보인다. 인공위성일까? 별일까? 이곳에는 우주의 진리를 쫓던 수많은 Comet Seekers가 머물렀고, 그 여정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 최초 대학 식물원도 있다.
돔이 인상적인 성당과 주택가 사이 고즈넉한 곳, 1545년 설립된 식물원.
괴테가 이곳의 야자나무를 보고, '원형'과 '변형'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어 ‘식물의 변이‘라는 에세이를 썼다고 한다. 역시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괴테 야자수는 유리 온실에서 잘 자라고 있었다. 괴테가 남긴 발자국 사이로 나만의 산책이 이어진다. 그저 천천히 걸으며 바람과 꽃, 나무를 발견한다. 걷다 보면, 종소리가 들려오고 하늘은 파랗고마음은 평온해진다.
파도바에는 8곳의 유네스코 프레스코 유적지가 있다. 머무는 동안, 저마다 개성과 역사를 자랑하는 프레스코화를 하나하나 찾아다녔다.
'프레스코(Fresco)'는 이탈리아어로 '신선함'을 뜻한다. 덜 마른 석회벽 위에 안료가 스며들어 그림과 벽이 비로소 하나가 되는 기법. 덕분에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공기는 벽 속에 박제되어 있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회벽은 군데군데 허물어졌고 빛바랜 색채만이 남았지만, 그 차분한 파스텔톤 속에는 여전히 누군가 발견해 주길 기다리는 은유와 상징들이 숨 쉬고 있었다.
가장 유명한 건 조또의 스크로베니 성당이다. 파도바의 부유한 은행가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호화로운 궁전 부지 내에 개인 가족 예배당으로 건립을 의뢰한 것이다. 예배당에 들어서면, 천장과 모든 벽을 가득 채운 프레스코화에 압도된다.
아찔하다.
성당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5분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마주한 아쿠아마린색 천장은 시간이 소멸한 무한한 우주였다. 금빛 별들이 박힌 그 푸른 심연을 올려다보는 동안, 시간은 희미해지고 나는 14세기 이탈리아의 어느 밤하늘 속으로 영원히 침잠하는 착각에 빠졌다. 목이 아플 때까지 푸른 우주를 눈에 담아본다.
조토가 남긴 프레스코화 가운데 가장 강렬하게 남은 장면은 ㅔㅔ예수와 유다가 눈을 마주친 찰나였다. 유다의 입맞춤 직전, 두 사람의 눈은 불과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배신자와 배신당하는 자.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예수의 눈빛이 오래 남았다.
로마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경기장 위에 세워진, 소박한 외관을 가진 스크로베니 성당에도 숨은 이야기가 있다. 엔리코의 아버지 레지날도는 고리대금업으로 축적한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로, 훗날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등장할 정도였다고 한다. 비슷한 운명을 피하고 싶었던 아들이 지은 예배당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과연, 천당에 갔을까.
마지막 날엔 파도바 대학 '자이언트 홀'(Sala dei Giganti)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갔다. 운 좋게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과거 파도바 공화국의 군사 총독 집무실이었던 카라레시 궁전의 거대한 홀에는 파도바답게 프레스코화가 가득하다. 차려입은 뮤지션들, 학생들, 교수진과 동네 사람들 사이에 앉았다. 할머니 손을 잡고 온, 꼬마 소녀가 나를 보고 웃는다. 양갈래로 땋아 내린 갈색머리, 콧등에 주근깨가 귀엽다.
이탈리아 거장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건반 위를 유영하는 연주자의 손가락은 파도처럼 너울대며 춤을 추었다. 앞자리에 앉은 꼬마 소녀가 리듬에 맞춰 발을 까딱거리더니 어느새 꾸벅꾸벅 존다. 밤이 깊어간다.
클라이맥스를 향하던 선율이 멋지게 내려앉자, 박수 소리가 거장의 방에서 메아리친다. 화들짝 깨어난 꼬마 소녀가 손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다 눈이 마주쳤다. 배시시 웃는다. 잘 자고 일어난 얼굴이다. 나도 힘차게 손뼉 치며 웃었다. 이 놀라운 음악회는 파도바가 내게 건넨 마지막 '세렌디피티'였다.
깊은 밤,
가을 정취에 젖은 나는 발길 닿는 대로 파도바 골목 여기저기를 걸었다.
달밤, 오래된 도시에서 마주친 젊은이들, 내가 좋아하던 가게들, 거장의 발자취들.
강의실과 카페에서 토론의 열기에 휩싸인 학생들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젊어진다면,
이 고풍스러운 풍경 속이라면,
그들처럼 학문과 배움에 푹 빠져 무언가를 발견해내지 않았을까.
숫자와 효율, 속도의 언어로 가득 찬 서울의 풍경이 잠시 스쳤다.
그곳의 질문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면, 이곳 파도바의 질문은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에 닿아 있는 듯했다.
내일이면 나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딸을 만난다. 그곳에서는 또 어떤 다정한 눈 맞춤과 예기치 못한 기쁨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2025년 9월,
파도바 별이 지는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