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탐사일지 22화
커튼을 뚫고 아침 햇살이 얼굴에 비쳐 들었다. 테라스에 나가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다.
"오늘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가르다 호수로 향했다.
이탈리아 북부의 호수는 오래전부터 내게 로망의 대상이었다. 수년 전 가족과 찾았던 겨울 코모 호수(Como)는 짙은 안개와 흩뿌리는 비에 갇혀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호숫가에서 무채색 풍경을 바라보던 안타까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번 여행엔 반드시 햇살이 부서지는 푸른 호수를 보리라 벼르던 중, 드디어 해가 얼굴을 내민 것이다.
파도바에선 가르다 호수(Garda)가 더 가깝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호수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품은 여러 마을 중에서도 풍광이 으뜸이라는 시르미오네(Sirmione)로 향했다.
트램과 완행열차, 버스를 갈아타며 마침내 도착한 그곳에는 내가 꿈꾸던 풍경이 있었다.
따스한 햇살과 파란 하늘. 그래, 이거지.
꼬모의 아쉬움을 딛고 마침내 가르다!
지도도, 앱도 열지 않고 그저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걷는다. 온천으로도 유명한 토요일의 시르미오네 거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중세 요새의 모습을 간직한 스칼리제라 성문 다리를 건너자, 예쁜 상점들과 탐스러운 꽃나무들이 반겼다. 문득 시야가 탁 트이며 바다 같은 호수가 나타났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 푸른 품을 향해 달렸다.
호수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 너머로 알프스 산줄기가 웅장하게 솟아 있고, 그 아래 옹기종기 모인 마을 위로 찬란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알프스 빙하에서 유입된 맑은 물은 햇빛에 따라 아쿠아마린 색에서 짙은 푸른색까지 다채로운 빛을 뿜어냈다.
지상낙원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흐드러진 분홍 꽃나무 아래 카페에서 꼬르네또와 카푸치노 한 잔을 곁들이자 절로 행복이 차올랐다. 하얀 물새와 오리들이 헤엄치는 호수 위로 갓난아기를 데려온 대가족의 웃음소리가 섞여 든다. 원색 수영복을 입은 할머니와 생전 처음 호수에 몸을 담그며 울다 웃는 아기. 그 기쁨이 햇살처럼 반짝였다.
호숫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은빛 윤슬이 부서지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가장자리 옅은 곳에는 하얀 석회암 같은 암석이 호수 바닥을 이루고 있어, 물빛이 곱디고왔다. 호숫가를 따라 전망이 좋은 곳에 호텔들이 늘어서 있고 호텔마다 전용 썬베드와 카페, 레스토랑, 수영장 등을 구비하고 있었다. 여름이면, 바로 호수에 뛰어들어 수영을 즐길 수 있었겠지.
한적한 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바위너머 호수물이 찰랑였다. 시르미오네는 호수 쪽으로 육지가 툭 튀어나온 반도 같은 곳이다. 나는 지금 그 끝에 서있는 것 같았다. 길이 끊긴 지점, 내 앞을 걷던 검은 사냥개와 한 커플이 돌아서지 않고 서성였다. 호수물이 얕아 보이긴 해도, 젖지 않은 채로 건너갈 수는 없을 텐데. 반대편이 얼마나 깊어질지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거침없이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갔다. 검은 개가 컹컹 짖으며 주인을 따라 헤엄을 쳤고, 세 존재는 금세 절벽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돌아섰다. 하얀 바지에 아끼는 가죽 셔츠까지 입은 나그네에게 수중 행군은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 올리브 나무가 뒤덮인 언덕을 올랐다. 길 위에서 뜻밖에도 코끼리와 공부하는 동자스님 동상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 너럭바위가 깔린 해변이 나타났다. 찰랑이는 에메랄드 호수 수면 아래, 넓고 평평한 바위들이 깔린 풍광이 독특했다. 그곳에 물길을 건너간 커플과 검은 개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물길을 헤쳐가든, 언덕을 넘어 땅으로 오든 결국 목적지는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바위 앞에서 다시 마주쳤고, 가벼운 눈인사를 교환했다.
준비 없이 온 탓에 일광욕도 수영도, 온천욕도 할 수 없었지만, 호숫가 바(Bar), 전망이 좋은 자리를 잡았다. 나폴리에서 다 마시지 못했던 오렌지빛 술, 스프릿츠(Spritz)를 주문했다. 옆 자리 독일 가족의 유쾌한 수다를 배경 삼아 홀짝이다 보니 기분 좋게 술기운이 올랐다. 가방에서 파도바 시장표 납작 복숭아를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과즙이 터지는 순간,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팬심은 이렇게 완성되는가?
절로 미소가 났다. 가르다 호수를 꼭 와보고 싶었던 것도 영화 속 호수가 너무 매혹적으로 보였기 때문인데… 나는 그 영화 때문인지,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를 유독 좋아하게 되었다. 영화 속 청순한 사춘기 소년이었던 그는 이제 "위대함을 추구한다,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Boys, be ambitious!"라 했던가.
위대한 삶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보통의 인간인 나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한때는 내 삶은 왜 이리 시시하고 특별한 구석이 없나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왜 나는 야망이 없을까'
‘큰 뜻을 품었다면 다르게 살지 않았을까' 자책도 했다. 하지만 이 나이에 와서야 알게 된 것도 있다.
꿈꾸지 않는다면, 이룰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꿈을 꾸었다 해도 삶이 다른 곳에 데려갈 수 있다는 것.
그저 세상에 나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선한 영향력이나마 끼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빅한 소망을 가져본다. 아니, 사실 그조차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을 이제는 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 세상 어디쯤 와 있는가?
그때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하얀 유람선이 뱃고동을 울리며 지나갔다. 나는 여전히 꿈꾸고 싶다. 무언가 나만의 것을 이루고 싶다는 뜨거운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Call me by your name, 티모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태양은 강렬했고 호수는 빛났다. 술 한 모금을 더 홀짝이자 호수를 건너온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얼음 잔 속의 스프릿츠는 쌉싸름한 어른의 맛이었고, 분홍빛 납작 복숭아는 첫사랑처럼 달콤했다.
술기운 때문일까?
내 눈앞에 자메이카 비치라고 쓰여있는 표지판이 보였다. 여기가 자메이카 비치라고? 이탈리아, 가르다 호숫가 마을 시르미오네에? 뜬금없는 지명에 로마 호텔 1층에 있던 마이매미 펍이 떠올랐다.
쿵짝쿵짝! 절로 음악이 들렸다.
나는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내 앞에 무엇이 있든, 지금 이대로 좋다.
돌아오는 길에 사 먹은 젤라토는 시원하고 달콤했다. 이만하면 참 멋진 보통의 하루다.
P.S. 지도 앱 없이 호기를 부리다 베로나 시내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기차 시간에 맞추느라 땀 흘리며 달음박질해야 했지만, 이 또한 즐거운 추억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