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탐사일지 21화
파도바 근교로 떠날 리스트는 길었지만, 연일 쏟아지는 비에 엄두를 못 냈다. 그러던 어느 날, 짙은 회색 구름을 뚫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이름부터 '요새' 그 자체인 치타델라(Cittadella).
우리 가족은 애니메이션 마니아다. 각자 취향은 달라도 서로의 '최애' 영화를 함께 봐주는 것은 우리 집만의 기본 예의다.
"첫 화만 참아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거야."
막내의 끈질긴 권유로 입문한 '진격의 거인' 시리즈를 지난봄 극장판까지 완주하며, 나는 그 낯설고 압도적인 세계관에 매료되었다. 거대한 성벽 안에 갇힌 인류가 벽 바깥의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
치타델라의 성채 사진을 마주한 순간 직감했다. 여긴 꼭 '입성'해야만 한다고.
입체기동장치를 단 엘런이 당장이라도 성벽 위를 날아다닐 것만 같은 곳으로.
날씨 때문일까, 성벽 위에는 중년 부부와 나, 단 두 팀뿐이었다. 성벽 안으로는 낮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정겹고, 밖으로는 360도 방사형으로 뻗은 도로와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북쪽으론 병풍처럼 우뚝 선 알프스 능선이 위용을 드러내고, 성을 둘러싼 초록 해자와 성문이 굳건히 자리를 지킨다. 일부 훼손된 구간은 보수 중이었지만, 성채와 방어 시설은 놀라울 만큼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옛 순찰로를 따라 성벽 전체를 한 바퀴 도는 내내 감탄이 터져 나왔다.
치타델라 성벽은 1220년경, 도시 국가 간 전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파도바인들이 세웠다. 숱한 점령과 전쟁을 견뎌낸 이 성벽 안에는 지금도 강인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묘한 단단함이 느껴졌다. 어떻게 이토록 철저하게 과거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 밑바탕에는 대단한 결심과 사회적 합의, 그리고 개인의 희생이 뒤따랐을 것이다. 일상의 불편을 감내하며 지켜내는 가치. 부수고, 새로 짓고, 개발하는 것만이 최선이라 믿는 우리에게 그들의 고집스러운 보존은 경이로움을 넘어 숙연함까지 느끼게 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중세의 시간이 짙게 고여 있어, 지금이 2025년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아무도 없는 성벽 위, 나는 알프스 산맥을 향해 크게 숨을 들이켜고 "야호!"를 외쳤다.
시카고의 5 대호를 향해, 프랑크푸르트의 라인강을 향해, 두브로브니크의 아드리아해와 오사카 성벽의 깊은 구멍, 그리고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을 향해... 그 시절 외쳤던 주문을 다시 불러내 본다.
야~호! 나 여기 있다. 야호! 내가 간다.
속이 후련하다. 가슴속으로 상쾌한 공기가 차오르자 설명하기 힘든 벅찬 감정이 함께 차올랐다. 나는 성채 위를 어린아이처럼 달렸다. 문득 열망 하나가 피어올랐다. 언젠가 이 여정의 끝, 북쪽의 바닷가 어딘가에서 다시 야호를 외치고 싶다고.
오로라야, 기다려라. 내가 간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교차하는 이 짧은 질주가,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이 시원했다.
잦아든 비를 맞으며 '진격의 거인' OST를 들었다. 웅장한 선율을 배경 삼아 성벽을 완주하며 속으로 작별을 고했다.
"그래, 좋아한다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안녕, 나의 거인들."
다음 행선지는 알프스 산자락과 맞닿은 바사노 델 그라파. 이름들이 특이하다. 치타델라. 바사노 델 그라파. 도시 이름에 등장하는 바사노는 화가다. 그의 그림 두 점이 루브르에서 모나리자 양옆에 걸려 있다고 한다.
도시의 상징은 지붕 덮인 와인색 목조 다리인 '알피니 다리(Ponte degli Alpini)'다. 다리의 전경을 담고 싶은 욕심에 강가 바위 위로 올라갔다가 아찔한 순간을 맞았다. 비에 불어난 강물은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신사의 매너 있는 손길 덕분에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사진을 보고 엄지척을 했지만, 꾸지람이 동시에 담긴 그의 눈빛에 머쓱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정오가 훌쩍 지나도록 카푸치노 한 잔이 전부였던 탓에 춥고 배가 고팠다. 다리 근처 피자집에 들어가 마지막 남은 조각 피자를 주문했다. 뜻밖의 맛집이었던 그곳에서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이탈리아 친구가 알려준 대로 독한 식후주 '그라파'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마시자마자 몸과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갈 길 먼 나그네에게 '작업주'라는 그 별명은 과연 빈말이 아니었다.
비에 불어난 녹색 강물과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얼른 내 작은 다락방으로 돌아가 눕고만 싶었다. 따뜻한 수프, 아니 뜨끈한 라면 국물이 간절하던 그때, 매일 지나치던 길모퉁이 중국 슈퍼 선반 위에서 기적처럼 '신라면'을 발견했다.
거인의 성벽을 넘고, 알프스 산바람을 버텨낸 '진격의 하루'.
모든 순간이 경이로웠지만,
얼큰한 국물 한 모금이 있는 엔딩이 가장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