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카오스 새 안경
언제부터인가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을 기준으로 두 개의 구역이 형성되었다. S 구역은 전체가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슈퍼 양자컴퓨터이자, 각자의 메타세계에 빠진 시뮬러들이 사는 곳. 강 건너편 R 구역은 한때 제이가 살던, 현실의 냄새가 남아 있는 곳이다.
제이가 향한 곳은 X Change 센터. R 구역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기차역은 스산했다. 플랫폼 한쪽에서 늙은 개가 햇빛을 받으며 졸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제이의 머리를 흩뜨린다. 진짜 바람이다. 안경을 벗자 코끝을 스치는 물비린내와 뒤섞인 여러 냄새가 밀려왔다. 불쾌하지 않았다.
— 삶은 원래 이런 것이었다.
외투 주머니에는 전남편이 보내온 기차표가 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R 구역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제이는 이미 너무 먼 길을 왔다.
강은 넓고 물살은 셌다. 녹슨 철교 위로는 기차가 다녔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가끔 건너오는 사람은 있어도, 건너가는 사람은 없었다. S 구역 사람들에게 기차표는 벅차고, 이곳은 메타세계에 중독된 이들이 모여드는 삶의 종착역 같은 곳이었다. 현실은 잊고, 원하는 대로 시뮬레이션되는 세계만을 탐닉하는 사람들. 어차피 덧없는 삶이라면, 원하는 대로 살다 가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지 모른다.
제이는 다시 안경을 썼다.
센터 앞에 서자, 건물이 제이를 인식하고 문이 열렸다. 새하얀 방. 깊은 곳에 칸막이가 있고, 철제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의자에 앉자 인기척이 들렸다. 감청색 철도원 유니폼을 입은, 머리 희끗한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기차를 타러 오셨나요?”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
칸막이의 액정에 기차 시간표가 떠오른다.
제이가 가지고 온 기차표도 시스템이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매일 정오에 왕복 운행하는 기차가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뇨. 저는 X Change 센터를 찾아왔는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변했다. 회색 작업복에 친절한 몸짓. AI 서비스 직원이었다.
“X Change 센터의 톰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머리 위 유리판에 '무료 상담 오 분'을 알리는 문구가 뜬다. 제이가 서둘러 말을 꺼낸다.
“시뮬레이터에 버그가 생긴 거 같아요. 화면이 깨지면서 중첩돼요. 눈도 시리고요.”
“검사해 드리겠습니다.”
톰은 시뮬레이터 안경을 받아, 원반 위에 올렸다. 회전하는 원반 위로 복잡한 코드와 수식들이 지나간다.
“‘스위트 홈’ 초기 버전이군요. 요즘은 모두 ‘홈 스위트 홈’으로 옮겼는데 아직 이걸 쓰셨네요.”
제이는 곰팡이 냄새가 나는 시멘트 동굴 같은 공간에 홀로 앉아 있어야 했다. 숨까지 참으면서 두 눈도 꼭 감은 채 기다렸다. 안경을 벗은 사람을 위한 배려는 전혀 없는 곳이었다. 얼른 다시 쓰고 싶었다.
잠시 후 톰이 안경을 건네주자 제이는 서둘러 그것을 받아 썼다.
눈앞이 다시 새하얀 방으로 환하게 바뀐다.
"철저히 분석해 본 결과 버그는 없습니다. 시뮬레이션은 모두 고객님이 직접 설정한 대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시뮬레이션 안경에 아무 이상이 없고, 버그도 없다는 말에 제이는 화가 났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 왜 이러고 있죠?”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 제이는 머쓱했다. 속으로는 과연 AI에게 답을 들을만한 질문인지 싶었지만, 서비스 직원이 아니면 누구에게 묻겠는가?
“그걸 제게 묻는 건가요?”
톰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바로 답을 하지 못한다.
“그건 좀 철학적인 질문인데요. 아니, 존재론적 질문일까요?”
톰의 말을 들은 제이는 속으로 그가 철학자나 심리학자로 변할까 봐 걱정되었다.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명확히 설명해야 했다.
“내가 설정한 세상은 하루가 전부예요. 즐거운 집에서 행복한 매일을 반복하는 세상이라고요. 그런데 준이 자꾸 내일을 말해요. 집 밖 세상을 궁금해하고, 모험을 하고 싶어 한다고요.”
제이의 이야기는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지만, 톰은 서비스 직원답게 경청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떠오른 묘한 표정 때문에 제이는 당황했다.
안경을 자주 벗어서 자의식이 돌아온 탓일까.
아니면, 아이의 모험심을 버그라고 말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운 것일까.
눈앞의 톰은 단지 멀티 기능을 수행하는 다목적 AI일 뿐이었다. 게다가 비용 절약 차원에서 고용된, 말 그대로 ‘서비스 직원’. 그런 톰에게 제이는 ‘내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톰이 진지하게 시뮬레이터 데이터를 다시 점검하며 말했다.
"구 버전이긴 하지만 ‘스위트 홈’ 시리즈는 안정적인 것으로 유명합니다. 초기 설정한 고객의 취향, 선호, 선택을 바탕으로 그 한계 안에서만 구동되지요. 요즘은 모두 카오스 포메이션을 따르지요. 아, 잠깐만요. 지금 보니 반전이 설정되어 있었군요."
“반전이요?”
“네, 고객님이 설정한 반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개된 모든 것을 포함한 반전이군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설계했는데, 이게 다일 리가 없어.
하지만 제이는 처음 어떤 설정을 해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뮬레이션이 개시되면 설계도는 사용자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결론을 알면 재미가 반감되고, 동시에 유저가 이 세상에 머무르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했다.
머리 위 유리판의 무료 상담 타이머가 10초 정도 남았다.
제이가 황망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톰이 입을 열었다.
“고객님, 무료 상담시간은 끝났습니다. 저희 서비스에 만족하셨나요? 부디 높은 별점을 부탁드립니다.”
기계적인 미소였다.
“아, 잠시만요. 시스템 버그가 아니라면 눈이 시리고 아픈 이유가 뭔가요? 자꾸 세상이 깨지고 겹치기까지 하던데요. 이건 설정이 아닐 거 같은데요.”
“눈이 시리고 아프다고요…”
톰은 벌써 하얀 가운을 입은 검안사로 변해 있었다. 그는 시력 검사를 시작했고, 제이는 지시대로 눈동자를 굴리며 움직였다.
“수정체의 탄력이 감소되어 조절력이 떨어지는 증상입니다. 한마디로 노안이 왔습니다.”
“노안이요? 하지만 나는 겨우 서른여섯인데요.”
“시뮬레이션 거주 시민들이 흔히 겪는 조기 노안입니다. 근거리에만 초점을 계속 맞추다 보니 수정체에 무리가 가는 건 어쩔 수 없지요.”
치명적인 버그가 아니라 노안이라니, 다행이면서도 왠지 서글펐다.
이번엔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영업사원 톰이 앞에 앉아 있었다.
“새로 출시된 하이퍼 렌즈는 생각만으로도 현실과 시뮬레이션 세상을 전환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노안 교정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습니다.”
“톰, 나는 새 안경을 살 여유가 없습니다.”
제이가 낡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지금 신제품 출시 마케팅 차원에서 선착순 무료 체험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 그럼 저도 사용 가능한가요?”
몸을 앞으로 기울인 제이에게 톰은 과장되게 웃으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아주 운이 좋으시네요. 하이퍼 렌즈의 장점은,….”
톰의 말문이 청산유수로 이어졌다. 설정상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도록’ 되어 있는 듯했다. 제이는 슬슬 집에 혼자 둔 준이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멍하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긴 제품 설명이 끝나자 톰이 서랍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안경을 꺼냈다.
“하이퍼 렌즈 체험에 동의하십니까? 그럼 이 약정서를 확인하시고 동의 사인을 하셔야 합니다.”
제이는 액정패드를 건네받자마자 서둘러 사인했다. 절차가 끝나자 톰은 새 안경을 칸막이 너머로 밀어주었다.
날렵한 테, 깨끗한 푸른빛 렌즈. 오래된 안경과는 차원이 달랐다.
안경을 바꿔 쓰는 순간, 무미건조한 하얀 방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변했다. 가구 하나 없던 방에는 현대적인 가구가 놓여 있는 고급 상담실로 변해 있었다.
“오! 세상에.”
제이가 감탄하자, 톰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제이님의 취향을 반영한 ‘홈 스위트 홈’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했습니다. 하이퍼 렌즈는 구 버전과 호환이 안 되거든요.”
“홈 스위트 홈 버전이요? 그럼 설정 내용이 달라지나요?”
“아닙니다. 처음 설계한 내용은 그대로입니다. 다만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기존 서비스보다 ‘카오스 포메이션’이 강화됩니다.”
“카오스가 강화된다고요? 난 그런 거 원하지 않아요.”
제이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내가 '스위트 홈'을 선택한 건 모든 게 초기 설정값대로 통제되고 있어 행복하기 때문이에요. 카오스라니요, 그건 불행의 다른 이름 아닌가요?”
톰이 당황한 기색 없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홈 스위트 홈의 카오스는 실제 삶처럼 수많은 ‘우연’이 겹쳐 인연을 만듭니다. 행복이 훨씬 더 진짜처럼 느껴지실 겁니다. 진정한 몰입은 바로 그 의외성에서 나오니까요. "
톰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현재 겪고 계신 노안과 화면 깨짐은 뇌가 무한 반복되는 정지된 세계를 거부하며 내보내는 신호예요. 뇌는 새로운 자극을 보고 싶어 하니까요.”
“내 아들 준이가 얼마나 활발하다고요.”
“그렇다면 더더욱 하이퍼 렌즈가 필요하시겠네요. 행복이 훨씬 더 진짜처럼 느껴지실 겁니다. 진정한 몰입은 바로 그 의외성에서 나오니까요. 지금 쓰시던 구버전으로는 준이의 눈동자에 맺히는 찰나의 기쁨이나, 웃을 때 번지는 그 온기를 절반도 채 느끼지 못하셨을 겁니다.”
제이는 '준'의 이름이 나오자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아이를 더 선명하게, 더 진짜처럼 볼 수 있다는 유혹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이는 하이퍼 렌즈 너머로 보이는 센터의 풍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선명하고 쨍한 세계. 이 정도 해상도라면 준이의 눈동자 속 즐거운 우리 모습이 고스란히 보일 터였다. 제이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사인하신 약정서에 모든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약정서를 꼼꼼히 읽어주시길 추천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하이퍼 렌즈는 착용 후 하루가 지나야 최대 효능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제이는 주머니 속의 낡은 안경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일어서며 새 안경을 고쳐 썼다. 손에 닿은 새 안경의 매끄러운 감촉이 낯설고 차가웠다. 그리고 천천히 센터의 하얀 문을 밀고 나갔다.
늦은 오후의 한 줌 햇살이 발치에 떨어졌다.
문득 영원했던 오늘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그제야 스쳤다.
내일, <홈 스위트 홈> 완결 편 3화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