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을 달리면, 슬로베니아 피란이다.
트리에스테가 궁금했지만, 이번엔 패스.
여기서부턴 딸의 계획표대로 움직인다.
편안한 마음으로 졸졸 따라다니기로.
버스는 아드리아해 해안길을 돌고 돌아 달렸다. 바다를 실컷 봤지만 아무리 봐도 물멍, 바다멍은 질리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있지. 아무리 봐도 좋은 것, 언제 봐도 좋은 것. 그런 게 있어 사는 거지.
역시 나는 인자요수파.
슬로베니아는 1991년 태어난 신생국, 인구 210만 남짓, 작지만 부유한 나라다. 한때, 유럽 사업을 한창 벌일 때, 이 나라를 공략하고 싶어 꽤나 들여다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이제야 연이 닿았다.
피란이란 이름은 그리스어 등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만큼 유서 깊은 항구 도시였겠구나. 그 긴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피란의 첫인상은 아주 작고 예쁜 어촌 마을이었다. 중세시대 600년을 베네치아 공국이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지만 한적하고 소박했다.
마침 비가 개자, 우리는 언덕 위 성을 올랐다. 다음날 또 비 예보도 있고…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다 보니 아담한 성벽이 나타났다. 그곳에 오르자, 모든 게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광장 하나, 항구 하나.
언덕 위 큰 성당 하나, 성벽 하나.
바다로 길쭉하게 튀어나온 피란을 휘감는 해안길도 하나.
지도를 보고 알았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정겹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눈앞에 아드리아해가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왼편으로는 크로아티아. 오른편으로는 트리에스테, 그 뒤로 눈덮힌 알프스가 펼쳐져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배들이, 집들이, 길들이 보인다. 눈앞에 세 개 나라가 한눈에 보이는 장관이 있는 데도 자꾸만 반대편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축구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토너먼트로 진행되는지 여러 학교에서 온 듯한 축구팀들이 서로 다른 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어린 소년들이 초록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선수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코칭하는 감독의 고함. 관중석에선 부부젤라를 불며 응원하는 함성… 보고만 있어도 흥미롭고 싱그럽다.
우리는 성벽 난간사이로 한참을 구경했다.
와, 저 초록팀 잘 뛴다.
그러게 재, 잘 하는 거 같아.
심판의 휘슬과 함께 경기는 끝나고, 이긴 팀은 펄쩍 뛰어 오르며 신이 났다. 진 팀 아이들은 힘이 빠진 듯 천천히 걸었다.
아, 어떻게 졌나 봐….
한 부모가 뛰어나와 안아주었다. 그래, 잘했어. 멀리서 토닥이는 손짓이 보였다.
성벽은 일찍 문을 닫아 아쉬운 마음에 다음 날 또 올랐다. 포토타임도, 물멍도 다시. 예쁜 내 아이와 함께.
딸이 잡은 숙소는 유난히 마음에 들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이면 골목, 언덕 바로 아래 자리한 3층 방.
창을 열고 뒤꿈치를 살짝 들면 멀리 바다가 보였고, 침대는 푹신했으며, 부엌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나무로 된 가구들은 과하지 않게 품위가 있었다.
주인장이 선물로 남겨둔 터키식 커피를 마시며,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던 그의 삶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작고 예쁜 집을 꾸미고, 사람들에게 방을 내주며 살아가는 일.
꿈같은 이야기였다.
피란이 아이의 동선에 들어왔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를 떠올렸다. 극 중 조인성이 연인 앞에서 교통사고를 입고 세상과 등지고 숨어든 어딘가. 왠지 상처 입은 사람이 잠시 숨어 살기 좋은 곳. 디마프 속 조인성은, 여기서 무얼 하며 지냈을까…
한때 누군가 이상형이 누구냐고 물으면, 슈퍼맨이었다가, 브루스 윌리스였다가, 조인성이었다.
어릴 적 아빠 손을 잡고 간 어두운 극장에서 만난 슈퍼맨은, 시간을 되돌려 죽은 연인을 살려냈다.
브루스 윌리스는 맨발로 유리를 밟으며 아내를 구하러 달려갔다.
조인성은, 발리에서 만났다. 엔딩 장면이 놀라웠고, 그래서 오래 남았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예전에 문득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빠가 어딘가에 붙잡혀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하러 갈 거라고.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봤지만,
그때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밑도 끝도 없이 결연하게.
나중에, 나중에 -
아이 둘을 낳고 넷이서 한 침대에서 구겨져 자던 어느 날 밤 내가 다시 말했다.
오빠, 구하러 갈 수 없을 거 같아.
뭐?
아기들 말이야. 누군가는 곁에서 지켜줘야 하잖아. 그러니까, 혹시 오빠도 나를 구하러 오지 마.
글쎄, 그 아가들도 다 큰 지금.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핑곗거리도 없는데.
그래도, 구하러 가야 하나?
반드시?!
이제는 친구 같은,
내 옆의 디어 마이 프렌즈.
하하.
딸아이와 산책하며 속으로 혼자 별 생각을 다 했다. 그때, 마을 끝에서 묵묵히 바다를 비추고 있는 낡은 등대 하나를 보았다. 긴 세월 동안 길 잃은 배들을 불러 모았을 그 빛의 마음을 가만히 헤아리다 보니,
“엄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빠를 꼭 닮은 딸아이가 내 손을 살짝 잡아왔다. 나는 그 손을 뒤집어 깍지 끼듯 맞잡았다.
따스했다.
내 마음속 결연함도 망설임도 결국은 이 온기를 지키고 싶었던 같은 마음이었음을 깨달았다.
피란(Piran)은 참 작고 평화로워, 생각이 아무리 멀리까지 달아나도 다시 조용히 사랑 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