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진열대 -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에 대한 탐구 그리고 반성
첫 진열대는 체언입니다. 여기에는 명사와 대명사 수사라는 단어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문장을 만들기 위해 어떤 재료가 적합할지 체언 진열대를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명사는 말 그대로 이름을 나타내는 단어들입니다. 그래서 이름씨라고도 하지요. 세상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름도 있고, 책상이나 책 같은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물건들의 이름도 있습니다. 때로는 사랑이나 믿음처럼 추상적인 개념의 이름도 있고 용이나 천사처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이름만 알고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명사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이름이 있기에 명사에도 다양한 구분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만 있는 여러분과 저의 이름은 고유명사로 분류되고 책상이나 책처럼 보편적으로 쓰일 수 있는 경우 보통명사라고 합니다. ‘사랑, 존경’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이름은 추상명사로 구체적인 개념의 이름은 구상명사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외에 ‘바다, 하늘’처럼 혼자 쓰일 수 있는 명사는 자립명사로 혼자 쓰일 수 없는 명사는 의존명사로 구분합니다.
명사들은 혼자 쓰이기도 하지만 주로 수식언 중 관형사의 꾸임을 받고 그 뒤에는 조사들이 결합하지요. 가령 ‘새 꽃이 피다.’라는 말에서 ‘꽃’이라는 보통명사이자 구상명사이자 자립명사는 ‘새’라는 관형사의 꾸밈을 받고 ‘이’라는 조사가 결합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새’라는 말이 없어도 ‘꽃이 피다.’라는 문장은 온전히 성립하기에 수식언은 필수가 아님을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이 피다.’라는 말에서 ‘것’은 ‘이’라는 조사가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사로 보이지만 ‘아름다운’이라는 꾸며주는 말이 없다면 즉, ‘것이 피다’처럼 완전한 문장이 될 수 없기에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이럴 때 ‘것’과 같은 명사는 의존적인 성질이 있다고 보아 의존명사라고 하는 것이지요. ‘것’만이 의존명사의 전부는 아닙니다. 부끄러운 경험담이지만 대학 시절 공부, 사랑, 군대, 취업 등을 주제로 참 많이 술을 마셨습니다. 그 시절 어느 날 아침 저의 자취방의 모습에서 따온 예시입니다.
'술을 한 병 두 병 마시다 보니 집에 병이 많다.'
이 말에서 ‘한 병, 두 병’의 병은 ‘한, 두’와 같은 꾸며주는 말이 없으면 온전한 문장이 될 수 없기에 의존명사로, ‘병이 많다’에서는 ‘병’은 홀로 쓰일 수 있기에 자립명사로 분류합니다.
여기에서 띄어쓰기의 문제를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헌 것’과 ‘헌것’ 중에 무엇이 맞을까요? 한글 맞춤법에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 단 조사는 그 앞말에 붙여 쓴다.’, ‘의존명사는 띄어 쓴다.’라는 규정이 있으니 ‘헌 것’이라고 적는 것이 옳게 보입니다. 하지만 사전을 찾아보면 ‘헌것’이 하나의 단어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헌것’이라고 써야겠지요.
이뿐만 아니라 새로 이사한 집이란 의미의 ‘새 집’은 ‘새집’으로 사전에 등재되어 있고 ‘헌 집’은 ‘헌’과 ‘집’이 별개의 단어로 사전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라고 띄어 써야 합니다. 하나의 단어로 볼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단어로 볼 것인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수많은 질문이 생기는 지점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합성어와 구의 구분에 있습니다. 합성어는 한 단어이고 ‘구’는 한 단어가 아니기에 띄어쓰기의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새것’, ‘헌것’, ‘새집’의 경우는 모두 합성어입니다. 실질 형태소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단어가 되어버린 말이기에 띄어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헌 집’은 하나의 단어로 굳어진 합성어가 아니기에 띄어 씁니다. 그럼 합성어와 구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기준이 무엇이다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현실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단어들이 결합하며 기존의 단어들이 가지고 있던 의미 외에 추가적 의미가 있는 경우 합성어로 판단하기는 합니다. 합성어 형성 과정에서 변화하는 소리, 의미, 문법적 특성 등을 고려하여 다양한 학문적 견해들이 있기는 하지만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아직 답이 없습니다.’ 또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직 초반에는 ‘학생들의 신뢰를 잃으면 어쩌나, 혹시 내가 모르는 답이 있나?’라는 고민과 자문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답이 없는 질문들이 재밌습니다. 답이 없으니 다양한 생각을 펼칠 수 있고 어쩌면 그중 하나가 답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아이들도 답이 없는 문제들을 좋아합니다. 시험문제에 잘 내지 않기 때문이죠. 합성어일까? 아닐까?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의외로 재밌는 결론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대명사입니다. 대명사는 말 그대로 명사를 대신하는 단어들입니다. 하지만 그저 명사를 대신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직접 가리킨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이름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가리킵니다. 가령 식탁에 놓인 빨갛고 맛있어 보이는 동글동글한 과일을 보고 ‘사과’라는 이름을 이용하여 ‘사과가 있다’라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식탁에 난생처음 보는 과일처럼 생긴 것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이렇게 물을 겁니다.
‘이거 뭐야?’
이때 사용되는 ‘이거’는 대명사 ‘이것’의 구어적 표현입니다. 이 상황에서 사과라는 이름을 이용할 때와는 달리 이름을 이용하지 않고 대상을 직접 가리키는 대명사의 특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대명사는 대상을 직접 가리키는 말이니 어떤 대상이냐에 따라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대상이 사람일 때 사용하는 대명사를 인칭대명사, 사람이 아닌 사물을 가리킬 때 사물 대명사, 장소를 가리킬 때 처소 대명사라고 합니다. 인칭대명사는 말하는 사람을 포함하는 1인칭 대명사, 듣는 사람을 포함하는 2인칭 대명사,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3인칭 대명사로 나누기도 합니다. 인칭 대명사에서 재미있는 점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말을 없다는 것입니다. 2인칭의 ‘너’나 3인칭의 ‘그’ 대신 ‘당신’이나 ‘그분’과 같은 표현을 통해 대상을 높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자기 자신을 높이는 1인칭 대명사는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겸손함이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인칭대명사에서 또 재미있는 것은 부정칭과 미지칭의 대명사들입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누구를 시켜볼까?’ 아이들이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순간이 순식간에 벌어지는 이 말에서 대명사를 찾으면 바로 ‘누구’입니다. 이때 ‘누구’는 교실 안에 있는 학생 누구든지 문제를 풀어야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특정 인물이 아닌 막연한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를 부정 칭대 명사라고 합니다. 부정(不定)은 부정(不正)이 아닙니다. 즉 옳지 않다는 의미의 부정이 아닌, 정해지지 않은 이라는 의미의 부정입니다. 부정칭(不定稱) 대명사라는 이름의 뜻을 아시겠죠? 하지만 ‘누구’가 항상 부정 칭대 명사인 것은 또 아닙니다. 초인종이 울리거나 노크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세요?’ 이때 사용된 누구는 정해지지 않은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누군지 모를 미지의 인물을 가리키는 상황입니다. 이때 ‘누구’는 미지칭(未知稱) 대명사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미지의 인물을 가리키기 때문이죠.
오늘 저녁에 무엇을 먹을까?
아무것이나 먹자
‘무엇’은 저녁에 먹게 될 아직 모르는 음식을 가리키니 미지칭 대명사이고, ‘아무것’은 특정한 음식으로 정하지 않는 표현이 부정칭 대명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인칭대명사에만 부정(不定)과 미지(味知)의 개념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정칭 대명사에 대한 수업을 할 때는 저의 이야기를 덧붙일 때가 많습니다.
부정칭은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라는 설명 뒤에 좋아하던 여학생과 저녁 약속을 잡아두고 저녁에 무엇을 먹으러 가야 할지 고민하느라 기쁨보다 괴로움이 컸다는 것이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대강 내용입니다.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선택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결단력이 부족한 성격 때문이라 생각했고 친구들은 우유부단이라는 말로 제 성격을 규정지어 줬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우유부단한 사람들에게 결정장애가 있다는 표현을 하기 시작하더군요.
‘과감한 결정을 못하는 것은 장애이다?’
신규교사 시절 늘 수업 준비에 학생 상담으로 꽉 찬 바쁜 시간이었지만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즐거웠습니다. 허물없이 친하게 학생들과 지내다 보면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나가곤 했습니다. 요즘 교사들은 자신의 수업에 대한 평가를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매년 받습니다. 별생각 없이 그 결과를 보던 중 충격적인 문구를 보게 되었습니다.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했다.’는 한 학생의 글에 저는 뜨끔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생각도 말도 가벼워졌던 겁니다. 수업이 즐거웠다, 유익했다는 식의 좋은 말들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고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글 한 줄만이 온통 머리에 가득했습니다. 어떤 학생이 쓴 글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결국 모든 반을 돌아다니며 학생들 앞에서 사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말 한마디 꺼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늘 조심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저의 시선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예전의 저처럼 무언가를 잘 결정하지 못하는 학생을 신중한 학생으로, 말이 없는 학생은 친구의 말을 잘 들어주는 학생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 글을 써준 학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체언의 마지막, 바로 수사입니다. 수사는 말 그대로 ‘수’를 나타내는 단어들의 집합입니다. 그렇다면 ‘수’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자연수, 정수, 분수, 소수, 유리수, 무리수, 허수 등 여러 수들이 있지만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수는 기수(基數)와 서수(序數)입니다. ‘하나, 둘, 일, 이, 삼’ 같은 말들을 기수라고 할 수 있으며 기초적인 수를 가리킵니다. 서수는 순서를 나타내는 수라는 의미로 ‘첫째, 둘째, 셋째, 제일, 제이, 제삼’ 같은 말이 이에 해당합니다. 기수는 수량을 셀 때 쓰는 말이라서 기수를 기반에 둔 수사를 수량 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량 수사는 북한어이고 이를 우리는 양수사라고 주로 말합니다. 또한 서수를 기반으로 한 수사는 순서 수사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서수사라고 합니다. 결국 수사는 ‘하나, 둘, 일, 이’ 같은 양수사와 ‘첫째, 둘째, 제일, 제이’와 같은 서수사로 나누어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010 통합번호 제도를 알고 계신가요? 과거 휴대전화 전화번호의 시작은 통신사마다 다 달랐습니다. 011, 016, 017, 019 등 여러 번호로 시작됐었죠. 하지만 2004년부터 새로 가입한 사람들의 번호가 010이 되더니만 2014년부터는 모든 번호가 010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휴대전화 번호의 시작은 010이고 그래서 010은 누르지 않아도 전화가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010을 [영일영]으로 읽으셨나요 아니면 [공일공]으로 읽으셨나요? 우리는 여기에서 ‘0’이라는 숫자를 [영]과 [공]으로 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영’과 ‘공’ 모두 한자어입니다. 이제 ‘1’을 읽어봅시다. [일]이라고 읽을 수 있고 [하나]라고 읽을 수도 있겠지요. 통화를 하며 계좌번호처럼 긴 숫자들의 조합을 말해야 할 때 1이나 2를 [일], [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 [둘]이라고 소리 내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수를 읽을 때 ‘하나, 둘, 셋’처럼 순수한 우리의 말, 고유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일, 이, 삼’처럼 한자어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사에도 고유어 계열의 수사와 한자어 계열의 수사가 존재합니다. ‘0’을 살펴보면서 눈치챌 수 있었듯 고유어 수사가 한자어 수사에 비해 많이 적습니다. 고유어 수사는 ‘하나’에서 시작해 ‘아흔아홉’으로 끝나니까요. 백(100)을 의미하는 ‘온’, 천(1,000)을 의미하는 ‘즈믄’이 있었지만 생명력은 이미 잃어버렸습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고유어가 사라질 것 같습니다. 우리의 고유어를 다시 찾아내는 작업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 우산 검정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
‘우산’이라는 동요의 가사입니다. 이 가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찢어진 우산이 아니라 ‘우산 셋이’와 ‘우산 세 개가’입니다. 이 두 부분에는 ‘셋’과 ‘세’, 즉 ‘3’이 숨어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수사일까요? 정답은 ‘셋’입니다. 수사는 명사, 대명사와 함께 체언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즉 명사나 대명사와 유사한 성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명사나 대명사 뒤에 조사가 결합하듯 ‘셋’이라는 수사 뒤에 ‘이’라는 조사가 바로 결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세’는 앞서 살핀 ‘것’과 같은 의존명사 ‘개’를 꾸며주는 기능을 하고 있기에 이어지는 수식언이라고 할 수 있고 품사로는 관형사입니다. 수와 관련이 있다고 모두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음에는 꾸며주는 말들이 모여 있는 진열대로 넘어가 보겠습니다.